
경한의 아버지 황사영(알렉시오)이 능지처참을 당한 후 어머니 정난주(마리아)는 두 살 난 어린 아들을 추자도에 떼어 놓고 관비(官婢)로 제주도 유배 길을 떠나는 슬픔을 표현한 “아가야, 교난(敎難)이 끝나면 너를 찾아 올 것이니 부디 몸 성히 잘 잘라다오!”라는 말씀이 있다.
제주도 성지순례길에 대정에 모셔져 있는 정난주의 묘를 찾아가는 길에 그 슬픈 사연을 들으면서 언젠가 시간을 내어 황사영과 정난주 부부에게서 태어난 어린 경한이가 홀로 섬에서 성장하여 묻혀있는 묘를 찾아가 보고 싶은 애절한 마음을 먹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지 십여 년이 지나 이태 전에 여름휴가를 내어서 가보기로 연초부터 계획을 세우고 그해 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고, 본당 레지오 이동희(에드워드) 단장 부부와 함께 오후 시간에 완도로 출발하였다. 4시간 후 오후 7시쯤에 완도 선착장 부근에 도착하였다. 하룻밤 묵을 숙소를 마련해 놓고 해변가 식당으로 들어가 싱싱한 회 한 접시와 매운탕으로 저녁을 먹고 밤바다와 늦여름의 밤하늘을 감상했다. 대구 도심지에서 볼 수 없는 여름밤 별들이 쏟아지는 하늘의 경치는 참으로 아름다웠으며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대우주를 보여주셨다. 성가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힘차게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내 영혼 주를 찬양하리니 주 하느님 크시도다. 내 영혼 주를 찬양하리니 크시도다 주 하느님.”
아침 일찍 추자도를 경유하여 제주도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하여 서둘렀다. 괜히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약속이나 해놓은 것처럼 200년의 세월을 거슬러 타임머신을 타고 보고 싶은 사람, 만나고 싶은 임을 향해 가는 나 자신이 옛사람이 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름 아침 청정지역의 남해바다는 너무나 깨끗했다. 카페리호가 바다를 가르는 물거품과 함께 갈매기 떼가 잘 어우러진 생동감 넘치는 바다 풍경을 바라보면서 3시간 여에 걸쳐 낮 11시에 하추자도에 도착하였다. 곧바로 추자공소 권용순(아니체도) 회장의 안내로 황경한의 묘소부터 찾았다. 제주교구에서 잘 단장해놓은 묘지에 다다랐다. 바쁘게 오느라고 빈손으로 찾았다. 명태포라도 놓고 소주 한 잔이라도 올려야 되는데 “경한 할아버지 죄송합니다. 이렇게 빈손으로 참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 부족한 마음을 받아 주세요.”라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두 번 절을 하였다. “할아버지! 소주 대신 제 마음을 드립니다.” 묘지 앞에서, 다시 한 번 어머니 마리아와 아들 경한이 생이별하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회상에 잠기었다. 젖먹이 갓난 아기를 떼어 놓고 돌아서는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의 슬픔을, 엄마의 품에서 떠난 아기의 울음소리에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끼면서 한참을 오묘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묘지 앞 대리석 좌대 앞면에는 <순교자 황사영(알렉시오) 신앙의 증인 정난주(마리아)의 아들 황경한(黃景漢)의 묘>라고 써 있고 뒷면의 오석(검은 대리석)에 흰 글씨로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황경한은 1800년 순교자인 아버지 황사영과 어머니 정난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아버지 황사영은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던 이른바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가 발각돼 대역죄인으로 처형되었으며, 어머니 정난주는 1801년 11월 21일(음) 두 살 난 아들 황경한을 가슴에 안고 제주로 귀양길에 오르게 된다.
정난주는 제주로 오던 중 추자도에 가까이 왔을 때 뱃사공에게 패물을 주고 ‘경한이는 죽어서 수장을 했다.’고 조정에 보고해달라고 애원하였다. 정난주의 부탁을 받은 사공들은 추자도에 이르렀을 때 에초리 서남단 물산리 언덕배기에 어린 경한을 내려 놓았다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소를 먹이던 부인이 가보니 아기가 있어서 집으로 데려왔는데 저고리 동전에 무엇인가 있어 뜯어보니, 부모의 이름과 아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후 아기를 그 집에서 기르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그곳에 사는 뱃사공 오씨(吳氏)였다.” 황경한은 성장한 후 혼인하여 건섭, 태섭 두 아들을 두었으며 현재 그 후손들이 추자도에 살고 있다. 황경한은 경헌(景憲)으로 불리기도 했다.
묘지 참배를 마치고 바닷가 쪽으로 외길을 따라 몇 발짝 내려오면 <황경한의 눈물>이라고 불리는 샘터 표지가 있는데 그곳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중략 … 정난주는 제주에서 관노로 37년 간 길고 긴 인욕(忍辱)의 세월을 살면서 늘 아들을 그리워하다 사랑하는 남편이 있는 하늘나라로 소천(素天)했으며, 아들은 자신의 내력을 알고 난후 항상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제주도에서 고깃배가 들어오면 어머니의 안부를 물어봤다고 전해진다. … “어미를 그리워하는 아들의 애끓는 소망에 하늘이 탄복하여 내리는 황경한의 눈물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늘 흐르고 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감동적이고 애틋한 사연을 추자 올레길과 함께 단장하여 지나가는 길손에게 잔잔한 감흥을 불어 넣고 있으며, 경한 할아버지가 주시는 마르지 않는 샘물을 마시며 달아올랐던 가슴을 식혀본다. 상추자에 있는 추자공소로 향하여 다음날 아침 아기를 내려 놓았다는 에초리 바닷가 바위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면서 아직도 추자도에 살고 있는 6대손 며느리와 손자를 찾아가 보았다. 할머니의 이름은 신중례(아가다)로 남편 황삼익 씨는 고인이 되셨다. 나이가 많아서인지 본인의 나이도 정확하게 모르는 것 같아 무슨 띠냐고 물어 보았더니 개띠라고 하기에 추정해보니 92세였고, 함께 살고 있는 아들의 이름은 황인수(세례는 받지 않았음)라고 한다. 나이를 물어 보니 60대 중반이라고 하는데 67세의 나이로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칠십은 넘어 보였다. 반갑게 손을 잡고 6대조 할아버지를 찾아서 이렇게 왔노라고 하고는 할아버지에 대해 물었으나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며 똑똑한 동생은 부산에 살고 있으니 동생한테 물어 보라고 한다. 혹 할아버지가 남겨놓은 유품 같은 것이 있나 하고 물었더니, 옛날에 살고 있던 집에 불이 나서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황경한의 유품이 소실되고 없어졌음을 아쉬워하며 불탄 자리에는 잡초만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사람은 자라는 환경에 따라서 이렇게 달라질 수 도 있구나 싶은 생각을 하다 문득 오래 전에 본 ‘늑대소년’ 영화가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열여섯 나이에 진사(進士) 급제를 하신 분인데, 마음 한구석이 찡했다.

오래 전 교회사 연구를 하신 고(故) 김구정 선생의 황사영에 대한 새 사료(史料)를 가톨릭시보(현, 가톨릭신문) 1973년 9월 2일자에 게제한 내용의 일부를 발췌해서 보면 이러하다,
<중략 … 경헌(경한)의 대한 이야기는 대구에 있는 황찬수(황사영의 6대 후손) 씨의 말에 의하면 자기 부조들에게서 전해온 말대로, 그 어머니 정씨 부인이 두 살 난 아들을 안고 제주도 귀양길을 떠나 제물포 앞바다에서 배를 타고 오는 도중 아들을 외로이 내려놓을 추자도 가까이 왔을 때 정씨 부인은 그 아이의 장래를 생각해서 몸에 지녔던 패물 몇 가지를 사공들에게 가만히 주면서, 이 아이는 귀양 오는 도중에 급증으로 그만 죽은 것을 바다에 수장해 버렸다고 추자도 뱃사공들에게 전하라고 했다. 사공들은 정씨 부인 부탁대로 하였기 때문에 경헌(경한)이 자라는 동안에 아무도 그를 귀양온 사람이라고 말한 이가 없이 무사히 자랐다고 한다. … 일본에 있는 황사영의 4대손이라는 황대성 씨가 김구정 선생 앞으로 보내온 편지 내용 중에는 어려서 그 부조들에게서 들은 대로 자기 4대조(경헌)가 두 살에 추자도로 귀양 왔을 때 서울에서 따라온 여종이 그 아기를 기르다가 얼마 후 몰래 충청도로 도망쳐 몇 해를 지내다 아기가 좀 자란 후에 도로 추자도로 와서 살았는데 후에 결혼하여 아들 삼형제를 낳고, 맏아들은 아들 형제를, 둘째 아들은 외아들을 낳은 즉시 죽고, 셋째는 미성으로 죽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황대성은 경한의 후손이 매우 번창했으니 그 중에 한사람인 것이다. 이 분의 말이 다소 틀리는 것은 있으나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고 김구정 선생은 말하고 있다.
추자도는 사시사철 낚시하는 강태공들의 천국이라 할 만큼 바다 낚시터로 유명한 것을 처음 알았다. 낚시를 할 줄 모르는 필자는 전혀 생소한 환경이나 바다가 그냥 좋다. 조용한 여름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워 놓고 이태백처럼 고기가 물리거나 말거나 시를 읖고, 곡주(穀酒)를 마시며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을 벗 삼아 태평세월을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랴. 모든 것을 포기하면 행복할 것을, 손에 쥐고 놓을 줄 모르니, 인간의 욕심이란 한도 끝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선조들께서는 금전과 명예, 권력과 가족, 마지막 남은 목숨마저도 다 버리셨으니 진복팔단에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하느님 나라는 그들의 차지가 될 것을 확고하게 믿었음을 우리 후손들에게 알려 주시고 물려 주셨으나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알게 하고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전구해 주시고 있다.
우리 일행은 보고 싶었던 경한 할아버지와 함께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뜻있는 5일간의 휴가를 마치고 대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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