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주간 주님 수난 금요일 아침, 연풍성지로 출발하였다. 궂은 날씨에 봄비가 오락가락 하면서 막 피어난 벚꽃들이 가로수의 경치를 눈부시게 뽐내고 있었다. 두 시간 남짓 중부내륙 고속도로를 달리다 연풍 IC 나들목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들어서니 새로 지은 연풍성당 종탑이 눈에 들어온다. 몇 년 전 모습과는 다르게 도로도 새로 나 있었다.
오른편 주차장 한쪽에 주차를 하고 키만큼이나 높다란 십자가의 길을 따라 새로 지어진 성 황석두 루카 탄생 200주년 기념성당으로 향하여 가다가 옛날 모습 그대로인 대형 십자가를 지나면서 십자가에 깊은 절을 하고 주님 수난 금요일에 여기까지 오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드리고, 여기 묻혀 계시는 황석두 루카 성인을 만나 뵙고 사순기간동안 절제와 극기와 희생을 잘 지켰는지 반성문을 쓰고 꾸중을 들어야 한다.
넓은 마당을 지나 성당으로 향하는 길은 봄비에 젖어있고 순례객들을 위하여 깔아놓은 부직포를 따라 성당입구에 들어서니 소성당 입구에 무덤제대가 있는 곳을 안내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자매님 한 분이 조용히 조배하고 계셨다. 소리를 죽여가면서 들어갔지만 워낙 조용한 분위기라 자매님이 한쪽에 놓여진 방석을 깔아 주신다. 목례로 감사의 표시를 하고 감실에 계시는 주님께 큰 절을 하고는 무릎을 꿇었다.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치신 황석두 루카 성인의 순교신심을 본받을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성인의 삶을 닮도록 도와주소서. 또한 주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저희를 구하시기 위하여 고통을 참아 받으시고 지금 숨을 거두시고 무덤제대에 계시는 예수님을 깊이 묵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그러고는 오늘은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자 조용히 한참을 침묵가운데 묵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새로 단장한 성지는 성지입구 오른쪽에 100여 대의 차를 주차할 수 있는 큰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성지를 들어오는 입구에 조그마한 연못을 지나면서 십자가의 길이 제1처로 시작이 되어 100여미터 왼쪽방향으로 성인탄생 200주년 기념성당 동편 가까이에서 14처가 세워져 있다. 입구 연못을 지나면 성인과 함께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당하시고 함께 성인품에 오르신 다섯 분의 동상이 커다란 반석 위에 눈부시게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세워져 있다. 다섯 분의 동상 앞에 안내판은 이렇게 써 놓고 있다.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3월 30일 보령 갈매못(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서 순교한 다블뤼(안 안토니오) 주교, 오 메트로(오 베드로) 신부, 위엥(민 루카) 신부, 장주기(요셉) 회장, 황석두(루카) 회장 등 다섯 성인상과 성인들이 서울로 압송될 때, 그리고 다시 서울에서 갈매못으로 압송되는 도중에 쉬어 갔다는 반석.”
당시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회장이 이 반석 위에서 구경꾼과 그들 사이에 숨어있는 신자들에게 천주의 진리를 강론하자, 포졸들조차도 그 위엄에 눌려 감히 이를 말리지 못했다고 한다. 또 비신자들까지도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밝은 도리에 머리를 끄덕이면서 탄복해 마지 않았다는 전승이 내려온다. 고 오기선(요셉) 신부가 1970년12월 2일 충남 아산군 음봉면 삼거리에서 발견하여 절두산순교기념관에 안치하였다. 다섯 성인상 뒤편에는 향청(옛 공소)이 그 옛날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고 그 앞에는 성인의 무덤이 잘 손질된 상태로 성인을 찾아온 신앙 후손들을 큰 가슴으로 끌어안듯이 우리를 맞이하고 계신다. 성인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1813년 연풍 병방골(현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의 땅에 황 씨 집안에서 출생. 1834년 천주교 신앙을 진리로 받아들여 영세 입교. 1858년 주교, 신부의 회장 겸 복사로 활동. 1866년 (3월 30일) 보령 갈매못(현 보령시 오천면 양보리)에서 주님수난 성 금요일에 군문효수로 순교. 순교 후 양자(養子) 황 요한에 의해 고향 병방골에 안장됨. 1968년 (10월 6일) 병인 순교 복자 24위에 포함되어 시복.(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1980년 (7월 9일) 병방골 평해 황 씨 문중 묘에서 묘소 확인 발굴. 1982년 (8월 25일) 수안보 성당에 모셔져 있던 유해를 연풍성지로 천묘 축성. 1984년 (5월 6일) 한국 순교 성인 103위에 포함되어 시성.(서울 여의도 광장)”
그 다음은 연풍성지와 성인의 이야기가 계속 된다. “박해가 계속되던 시절. 연풍은 신앙을 지키려는 선조들이 문경 새재와 이화령을 넘어 경상도로 피신하는 길목이 되었다. 그들은 연풍에 도착해서 한숨을 돌렸고,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고개를 넘는 순간에도 틈틈이 기도를 바치곤 했다. 최양업(토마스) 신부님과 프랑스 선교사 칼래(강 니콜라오) 신부님도 연풍을 거쳐 경상도와 충청도를 넘나들며 교우촌을 순방했다. 그럴 때면 신부님들은 연풍 골짜기에 숨어 살던 교우들을 방문하여 비밀리에 성사를 주었다.”
연풍 병방골(장연면 방곡리)은 황석두 루카(1813~1866) 성인의 고향이다. 그리고 연풍순교성지는 성인의 묘소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천주교신앙을 받아들인 성인은 부친께서 “천주학을 버리든지 작두날에 목을 맡기든지 하라!”고 강요하자 “결코, 진리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작두날에 목을 들이밀었다. 이후 성인은 아내와 동정 부부로 살면서 인생을 교회에 헌신했다. 그러다가 병인박해 때 다블뤼(안돈이 안토니오) 주교님, 오메트르(오 베드로)와 위앵 (민 루카) 신부님, 장주기(요셉) 회장님과 함께 충청도 갈매못(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다.
작두날로 막지 못한 황석두 루카 성인의 신심. 하느님께서 약속한 대로 일생을 교회에 바쳤던 헌신적인 삶. 일찍이 성인의 이러한 열심을 알아챈 프랑스 선교사들은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여 곁에 두었다. 이후 성인은 선교사들에게 한글과 한문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고, 선교사들은 교우촌 순방에 함께 했으며, 다블뤼 주교님을 도와 한글 교리서들을 편찬했다. 페롱(권 스타니슬라오) 신부님의 말씀대로 성인은 “조선교구에서 가장 훌륭한 회장”이었다. 언제나 신·망·애 삼덕과 기도 안에서 살았던 성인은 주교님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포졸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자수했다. 그리고 서울로 압송되는 동안에도 구경꾼과 포졸들에게서 즐거운 낯빛으로 휘광이의 칼날을 받아 순교했다. 평소 원하던 대로 이 세상에서의 과거 대신 천상의 과거에 합격한 것이다. 황석두 루카 성인은 1984년 5월 6일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식에서 성인품을 받으셨다.
부유한 양반집 선비였던 황 루카는 19세 되던 해(1832년 임진년) 스승 이학규(1770~1835)로부터 천주교를 배우고, 천주교에 입교(21세)한 후, 입신양명의 뜻을 버리고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부친의 엄격한 반대에 부딪쳤으나 3년 동안 벙어리노릇을 하면서 집안 식구들을 모두 영세시키는데 성공했으며, 1845년 조선에 입국한 제3대 조선교구장 고 주교(페레올)님은 속성 수업으로 황 루카를 신부로 승품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황 루카 부인이 몸담고 있을 종신허원의 수녀원이 없어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황 루카는 고 페레올 주교에게 금욕과 절제를 위하여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받고 독신생활을 하였다.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님을 도와 교리서를 번역하여 교회서적 출판에도 참여 하였다. 1866년 3월 충청도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안 주교를 몇 십리나 따라가 주교님과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3월 23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30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장주기 회장과 함께 군문효수형을 받고 54세의 나이로 순교하셨다.
필자가 우연히도 연풍성지를 찾아간 날이 날짜는 다르지만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황석두 성인을 찾아뵙는 것이 우연의 일치였을까? 다시 한 번 주님의 수난 금요일, 주님께서 숨을 거두신 날 황석두 성인과 네 분의 순교자의 순교일과 일치한 기록을 보면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도(右盜)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하늘나라에 있을 것이다.” 하신 말씀이 곧 그날 참수를 당하신 다섯 분의 순교자에게도 “너희들은 오늘 나와 함께 하늘나라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아 가슴이 뛰었다.
“주님! 저희도 언젠가 주님께서 부르실 때 주님께서 ‘오늘 너희는 나와 함께 하늘나라에 있을 것이다.’ 하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큰 은총을 내려주시도록” 감히 청하면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성모 어머님께 매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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