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저는 성당 다닌 지 이제 1년이 조금 넘은 40대 중반의 형제입니다. 좀 답답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교회를 다녔던 저는 아내가 천주교 신자라서 관면혼을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을 위해 아내와 같은 종교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제가 답답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나 신앙생활 부분이 아니라 ‘성당의 분위기’입니다. 아내를 통해 레지오 마리애나 형제들 모임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아직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아 주일미사에만 참례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선배들 앞에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스럽지만 도무지 성당에 정이 안 간다는 것입니다. 지난 1년 동안 성당에 나가면서 솔직히 먼저 인사를 건네는 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신부님, 수녀님들도 먼저 인사를 건네지는 않더군요. 인사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분위기를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생활이 개인과 하느님과의 관계라고는 하지만 교리 때 ‘공동체’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또 ‘사랑의 삶’이 제일 중요한 계명이라 배웠는데 왜 성당에 가면 사랑의 삶과 공동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일까요? 성체를 받아 모시기 위해 성당에 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사실 재미도 없고요. 그래서 요즘은 그만 다닐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주일학교에 흥미를 느껴 그러지도 못합니다. 신부님, 제가 어떻게 해야 될까요?
A. 찬미예수님! 형제님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요즘 날씨가 더워졌는데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우선은 성당 다니시면서 서운함과 소외감을 많이 느끼신 것 같아 참 미안하고 또 미안합니다. 형제님 말씀이 백번 옳아요. 사랑의 삶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지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모아주신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더 큰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 또한 몹시 중요한 일입니다. 어쩌면 그러한 삶 자체가 신앙의 본질적인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진심으로 형제님 말씀에 공감을 합니다.
변명으로 비칠지 모르겠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편안하게 들어주세요. 지역에 따라 다르겠지만 2014년도 한국천주교 통계 자료를 보면 신자는 556만 명, 사제는 4,786명입니다. 신부님의 숫자는 은퇴하신 분들도 포함이 되고요. 대략적으로 신부님 한 분당 1,300 여명의 신자들을 만난다고 보시면 됩니다. 적은 숫자가 아니지요? 성당에서 활동하시는 수녀님들은 더 적은 숫자라고 보시면 되고요. 이러한 부분은 충분히 형제님께서도 이해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답답하신 것은 다른 부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지구에 70억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이 살아가지만 정말 똑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그리고 그 한 명 한 명에게 하느님께서는 각각의 삶을 주셨고 개개인은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며 자기 인생의 주인공입니다. 누구나 존중 받기를 바라고 누구나 사랑받고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우리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사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신앙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왜 그런지 사랑의 구현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속이 상하고 답답해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납니다. 왜 그럴까요?
형제님의 답답한 심정을 스스로 천천히 탐색해 보시면서 분류작업을 해보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가장 속상한 느낌이 어떤 느낌인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무엇이 원인이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등등. 그런 다음 ‘사랑’ 그 자체에 대해서 생각해볼까요? 사랑의 속성 가운데 '관계'라는 부분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잖아요.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이시잖아요. 성부, 성자, 성령이시며 한분이신 하느님께서 사랑 자체이시니 사랑에는 당연히 관계라는 속성이 있겠지요? 그렇다면 문제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답답한 심정이라 여겨집니다. 여기서 관계는 어떤 것이며 어떻게 형성하고 이어가고 키워갈 수 있을까요?
관계에는 반드시 ‘나’가 있고, ‘너’혹은 ‘그/그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관계의 대상이 얼마나 나에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느냐에 따라서 농도는 달라질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처음부터 굉장히 농도가 짙은 관계는 혈연으로 이루어진 관계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외의 관계는 시작이 되는 부분과 그것이 커져 갈 것인가? 끊어져 버릴 것인가? 하는 형성이 이루어지는 중간 단계, 그리고 형성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마지막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 중에 ‘인사’를 이야기 하셨는데 그것은 참으로 좋은 관계형성의 시작점이라고 공감합니다. 먼저 하느님의 자녀로 불림을 받은 신앙인들(사제, 수도자)이 관계의 주도권을 가져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잖아요. 그러면 그 관계의 시작을 내가 먼저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요?
인정받고 존중받고 사랑받는 체험을 한다면 정말 행복할 것입니다.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은 인정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제님의 서운한 마음, 진심으로 이해합니다. 사제인 저 또한 저의 사목분야가 아닌 장소에서 존중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경험을 하거든요. 최근에도 있었고요. 그럴 때 화가 나기도 해요. 하지만 그 순간의 느낌은 단지 스윽~ 떠오르는 잔상일 뿐,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사라지는 것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 느낌에다가 나의 신념이나 생각을 덧붙여 그것을 키워 ‘느낌’을 ‘의견’으로 바꾸어 버리는 습관적이며 무의식적인 정신과정을 선택한답니다. 그렇게 내 마음의 평화가 깨지면 불행하잖아요. 신앙이 나와 하느님의 관계라고 말씀하셨듯이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너그럽게 보아주세요. 그 또한 큰 사랑을 실천하시는 일이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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