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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에 가다 - 한국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토마스) 묘소를 찾아서
한국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 토마스


박철수(보니파시오)|경산성당

 

김범우(토마스), 한국 최초의 순교자! 우리 한국 땅에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하느님 때문에 최초로 목숨을 바치신 최초의 순교자의 묘지를 찾았다. 처음 순교자의 묘가 있는 곳은 충청도 단양(丹陽)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후에 후손들의 증언과 교회 사학자들의 증거로 경남 밀양 단장(丹場)으로 밝혀졌다.

처음 묘지를 발견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충청도 단양이 아닌 경상도 단장이라는 소식에 대구관덕정순교자 현양위원회 회원들과 제대로 조성되지 아니한 순교자 묘지를 찾았는데 묘지 앞 1킬로미터 정도에서 차량이 갈 수 없어서 걸어서 새로 발견된 묘지에 다다랐다. 전날 비가온 뒤라 황토 흙이 신발에 달라 붙어 걸음이 한짐이었다. 일행 모두는 적당한 자리에 나뉘어 서서 한국 최초의의 증거자인 김범우 순교자의 묘 발견에 감사의 기도와 사도신경, 주모경을 바치고 신앙선조에게 큰 절을 두 번씩 하였다. 그 이후 부산교구에서 대대적인 묘지 조성작업과 성지개발을 하는 과정을 가끔 접하면서 성지개발이 다 끝이 났다는 시점에 다시 방문하였으나 주위에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라 커다란 자연석으로 만든 14처가 올라가는 길에 세워지지 않은 채 바닥에 뉘어져 있었으며, 광장 역시 잔디밭 조성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후 십여 년이 지난 2년 전에 본당신자들과 함께 성지를 찾았을 때는 너무나 훌륭하게 성지로서의 모습을 잘 조성하여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새로 지어진 성모동굴성당, 한옥 양식지붕으로 지어진 사제관과 사무실 등 순교자 묘지를 향해 가는 왼편에는 한국교회 시작부터 커다란 사건들을 이십여 개의 돌에 새겨 100여 미터 가까이 잘 가꾸어 놓았다. 묘지입구 묘비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김범우는 1751년 서울에서 중인 역관 김의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세에 천녕 현씨를 아내로 맞아 이듬해 장남 인고(仁考)를 낳았고, 1773년 역과 증광시에 합격하여 종6품 한학우어별주부에 이르렀다. 그는 이승훈 등 초기 교우들과 가깝게 지냈고, 1784년 가을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겨울부터는 자신의 집이 교회가 되어 “명례방 공동체”가 생겨났다. 1785년 봄 모임을 갖던 중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났는데 양반들은 모두 풀려나고 그만이 모진 고문 끝에 단장으로 귀양을 가서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의연히 신앙을 실천하며 전교하다가 1787년 형벌의 여독으로 귀천함으로써 한국천주교회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한동안 잊혀졌던 묘소는 1984년 한국천주교 200주년 준비과정에서 추적되기 시작하여 1989년 후손들의 증언으로 파묘, 치아를 수습하고 감정을 거쳐 확인하였으며 2003년 묘지를 꾸며 이 돌을 세운다. - 2003. 9. 14 천주교 부산교구>

 

한국 땅에 천주교가 들어온 것이 1784년, 이승훈이 세례 받은 것이 우리 교회의 시작이다, 그로 부터 1년 뒤, 즉 1785년 봄 명례방사건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나면서 한국최초의 순교자가 탄생한 것이다. 지난해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께서 집전한 윤지충과 123위 복자 시복식 때에는 명단에 없었지만 이번 제2차 시복 추진 대상자에 이벽 선생과 함께 포함되어 있다. 가톨릭대사전에 명례방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을사년(1785년) 봄 추조(秋曹), 즉 형조(刑曹)의 금리(禁吏)들이 명례방(明禮坊, 현 명동성당 인근)에서 모임을 갖던 천주교인들을 적발 체포한 사건. 1785년 봄 이승훈(李承薰), 이벽(李檗), 정약전(丁若銓)·정약종(丁若鍾)·정약용(丁若鏞) 형제, 권일신(權日身) 부자(父子) 등이 명례방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종교적 모임을 갖고 이승훈이 천주교 교리에 관해 강론을 하고 있을 때 형조의 관리들이 우연히 이를 적발, 모임에 참가한 이들을 체포하고 천주교 서적과 성화상(聖畵像)들을 압수하였다. 이때 형조판서 김화진(金華鎭)은 체포된 이들이 모두 사대부(士大夫)이므로 중인 출신의 집주인 김범우만을 가두고 나머지 사람들을 훈방했으나 권일신은 그의 아들과 이윤하(李閏夏), 이총억(李寵億), 정섭(鄭涉) 등과 함께 형조로 가서 김범우의 석방과 성화상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화진은 이들을 돌려보내고 김범우를 간단히 문초한 다음 충청도 단양(丹陽)으로 유배시켰다. 이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으나, 이 사건이 유학생들에게 널리 알려짐으로써 이해 3월(음) 태학생(太學生) 이용서(李龍舒), 정숙(鄭淑) 등은 척사위정의 통문(通文)을 돌려 이 사건과 관계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뿐 아니라 친구, 친척에게까지 천주교를 물리치라고 강요했고, 안정복(安鼎福)은 직접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해 천학고(天學考), 천학문답 (天學問答)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사건의 반향으로 인해 이벽, 이승훈 등은 배교하게 되고, 김범우는 유배생활 1년 만에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하여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한국천주교의 첫 증거자 또는 첫 순교자로 불리는 김범우 토마스(1751-1786/1787년)의 묘가 발견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김범우의 유배지는 달레가 쓴 “한국천주교회사”에 근거하여 충청도 단양(丹陽)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 김범우의 묘를 백방으로 찾던 후손 김동환이 나타나면서, 가족에게서 전해지는 이야기와 호구단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김범우의 유배지가 단양이 아니라 밀양 단장(丹場)임이 새롭게 밝혀졌다.

그 후 부산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의 송기인 신부와 김범우의 후손들, 그리고 영남지방교회사 연구에 몸 바친 마백락(클레멘스) 등은 몇 년에 걸쳐 밀양과 삼랑진 지역을 답사하고 수소문 끝에 1989년 극적으로 김범우의 외손(손임덕, 당시 78세, 집안 대대로 묘지를 관리)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 산102번지 만어산 중턱에서 묘를 찾았다.

그 해 5월에 본격적인 묘 발굴을 시작하여 파묘한 결과 관 자리 위에 십자가 모양으로 놓인 돌 3개와 치아가 발견되었다. 이 돌은 순교자 황사영의 묘소 발굴 때와 같은 경우로 성물이 귀했던 박해시대에는 성물 대신 십자가, 나무묵주, 돌 등을 관 속에 넣어두는 경우가 많았다. 출토된 유물과 후손들의 증언을 토대로 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는 이곳을 김범우의 묘로 단정했고, 김범우의 신앙과 생애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도 높아졌다.

2011년 성지 입구에 건립된 사제관과 부대시설과 김범우의 묘가 있는 밀양시는 중부 경남의 중심지로 일찍부터 넓고 기름진 평야와 높은 산, 깊은 계곡이 많은 아름다운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 임진왜란 때 이름을 떨친 사명대사, 휴정 등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된 고장이다. 특히 재약산(858m)의 표충사와 만어산(670m)의 만어사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고찰(古刹)이기도 하다. 이 지역에 대한 천주교의 전래는 바로 김범우의 귀양살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김범우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온 해 가을 수표교(水標橋)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그러다가 입교자가 늘면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벽의 집에서 모임을 갖기 어려워지자 명례방에 있던 자신의 집을 제공함으로써 ‘명례방 공동체’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785년, 정기적인 신앙집회를 개최하다가 추조(형조) 관리들에게 발각되었다. 이것이 바로 일명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그는 동료들과 함께 형조에 끌려가 많은 매를 맞고 옥에 갇혔으나 끝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와 함께 끌려간 이벽, 이승훈, 정약용 등은 모두 소위 양반계층에 속한 인물들인지라 즉시 풀려 나왔지만 김범우는 교회 집회 장소의 집주인일 뿐 아니라 중인(中人) 신분이었기 때문에 멀리 밀양으로 귀양을 떠나야만 했다. 처연한 신세가 되어 유배지에 도착한 그는 만어산의 금장굴 부근에서 2년간 귀양을 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공공연하게 천주교를 신봉할 것을 설득하면서 “큰 소리로 기도문을 외우고 자기 말을 듣고자 하는 모든 이를 가르쳤다.”고 샤를 달레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형조에서 받은 혹독한 형벌의 여독으로 2년 정도 고생하다가 1786년 가을(혹은 1787년 초) 세상을 떠났다. 김범우가 죽은 뒤 후손들은 만어산을 중심으로 삼랑진읍 굴암리(掘岩里, 현 용전리), 단장면 등에 살면서 신앙을 전파했다.

한국천주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조정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형 집행을 당한 최초의 순교자는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순교한 윤지충이다. 그러나 비록 관아에서 사형선고를 받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그보다 앞서 박해와 형벌 속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그 형벌의 여독이 죽음의 직접적 원인이 된 김범우는 ‘장하치명(杖下致命)’한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서울의 명동성당은 한국교회 창설의 기점이 된 명례방 집회가 이루어졌던 김범우의 집을 역사적으로 기념하여 건립된 성당이기도 하다.

1989년 김범우의 묘를 발굴한 이후 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는 주변의 땅을 매입하여 순교자 묘역 조성사업을 진행하였다. 묘역에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제대와 1천여 평의 잔디밭을 조성하고, 도로변 주차장에서 묘역에 이르는 산길에는 대형 원석에 그림을 새긴 십자가의 길 14처를 세웠다. 그리고 묘역 주차장에서 묘역에 이르는 길목에는 20개의 돌에 한국천주교회의 기념비적인 사건들을 기록하였다. 수년간의 노력을 통해 묘역을 말끔히 단장한 후 2005년 9월 14일 정명조 주교의 주례로 묘역 준공미사를 봉헌했다. 이어 2010년 11월 순례객들을 위한 김범우 순교자 기념 성모동굴성당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착수하여 2011년 9월 20일 교구장 황철수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가졌다. 묘역 주차장 부지 한편에 세워진 성모동굴성당과 사제관의 완공으로 순례객들은 날씨와 상관없이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김범우 토마스는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가 추진하여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와 증거자의 제2차 시복추진대상자인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포함되었다. 부산교구는 장독(杖毒)으로 사망한 김범우의 시복시성을 위해 관련 사료를 수집하는 등 시복시성운동을 벌이고 있다.<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4년 8월 27일)>

잘 가꾸어진 성지에서 우리 일행은 큰 절을 두 번하고 신앙선조께서 주야로 바치신 사도신경과 주모경을 정성껏 소리 높여 기도하고, 이 땅에서 순교하신 모든 순교자들께 저희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시도록 전구를 청하며, 특히 신앙 선조들의 순교 신심을 본받을 수 있도록 해 주시고 나약한 저희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시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빌어 보았다. 또한 2011년 9월 20일 성지 초입 주차장 부지에 건립되어 봉헌식을 가진 성모동굴성당과 사제관 건물, 묘지참배를 하고 예쁘게 만들어진 성모동굴성당에 들어가 밝고 은은하게 켜져 있는 감실 앞에 검은 대리석으로 만들어 놓은 긴 의자에 앉아 잠시 묵상과 기도를 드렸다.

“함께 잡혀간 신자들 중 양반과 벼슬하는 사람들은 모두 풀려나고 중인 계급의 집주인인 김범우 신앙 선조만이 모진 매를 맞고 여기 밀양 단장까지 유배를 오셔서 혹독한 형벌의 장독으로 여기서 돌아가시고 이 자리에 묻혀 계시는 한국 최초의 순교자시여, 나약한 저희는 모진 매가 아닌 현세의 온갖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디 순교자의 혹독한 고문을 잘 견뎌내시고 신앙을 증거하신 용맹과 덕행을 본받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시고, 전능하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지켜주시도록” 전구를 청하며 묵상과 기도를 마쳤다. “언제나 이 땅에 순교성지를 참배하고 순례할 수 있도록 해주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