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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마당
저는 오늘 날개 없는 천사를 만났습니다.


김효경(벨라뎃다)|월성성당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쯤 한 아이를 복지시설에 데려다 준 적이 있습니다. 어릴 적 고향집 바로 윗집에 살던 남자 아이인데, 열 살쯤 되었는데도 걷지도 못하고 기어 다녔고 밥도 떠먹여야 하는 뇌성마비 1급 지체장애 아이였어요. 아이는 알코올의존증 아버지와 누나 3명, 여동생 3명 가운데 넷째로 귀한 외아들로 태어났지만, 귀한 대접은 커녕 가난하고 힘들게 자라면서 학교 문턱 한 번 가보지 못하고 집에서 돌봄을 받지 못한 채 지내야 했어요. 그 아이의 사정이 워낙 딱하여 저는 아는 지인과 함께 부모의 동의를 얻어서 복지시설로 그 아이를 보내게 되었답니다.

자신이 살던 집을 떠나오던 날,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아이인 줄 알았던 그 아이는 가족과 헤어져야 한다는 걸 알고는 제대로 움직여지지도 않는 몸을 이끌고 동생들과 일일이 포옹으로 작별을 고했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잊고 지냈었는데 14년 전, 제가 이곳 시설 옆에 있는 병원으로 취직이 되면서 그 아이를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낯선 이곳 시설이 싫고 가족 생각도 나고 해서 여기로 데려다 준 저를 많이 원망하기도 했다는데, 지금은 오히려 이곳에 오길 참 잘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와서 하느님을 알게 되었고 세례도 받았다고 했어요. 그 후로 가끔씩 출퇴근하면서 그 아이를 만날 수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이는 시설에서 나가 자립해서 살겠다고 하더군요. 손발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휠체어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데 어떻게 살겠냐고 만류했지만 그 아이는 완강했습니다.

자립해서 산 지 어언 10년, 그동안 양말장사, 뻥튀기장사 등등 안 해 본 일 없이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런데 나라에서 장애인 기초수급을 받으면서 장사를 한다고 누군가가 그 아이를 신고하는 바람에 여기저기 쫓겨 다니며 이제는 그 일조차 못한다고 했어요. 먹고 싶은 것 안 먹고 입고 싶은 것 안 입고 힘겹게 한 푼 두 푼 아껴서 하루에 두 끼만 겨우 허기 면할 정도로 먹으면서도 자신보다 더 불쌍한 사람을 도와준다는 얘기를 함께 온 도우미로부터 듣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이곳 복지시설에서 1년에 두 번 한마당잔치 바자회를 하는 날이었는데, 그 때마다 그 아이는 자신을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준 이 시설에 해마다 붕어빵 재료비를 보내주고 또 성탄절이 되면 자신보다 더 힘겨운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며 과자를 보내온다는 얘기를 듣고 저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 자신도 힘들게 살고 있기에 도리어 도움을 받아도 모자랄 판인데 게다가 자신이 속해 있는 장애인자립센터에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 써 달라고 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기부를 하고 있었다니….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조용히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도우미 아주머니는 집에서 못 먹어본 것을 그 아이 집에서 먹게 된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도우미 아주머니가 미안해 할까봐 맛있는 것을 사다놓고는 같이 먹자고 하면서 도우미 아주머니 덕분에 자신도 맛있는 것을 한 번 먹어 본다면서 오히려 도우미 아주머니를 배려하는 말을 해주어 도우미 아주머니가 더 고맙다고 입이 닳도록 그 아이 칭찬을 했습니다. 지금은 임대아파트도 당첨되어 12평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다고 해요. 그리고 얼마 전에는 아버지 첫 제사도 지냈다고 합니다.

그 아이가 시설로 오게 되면서 어머니는 집을 나가셨고 누나와 동생들도 다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술만 마시며 수십 년 동안 가족을 힘들게 하면서 자식조차 버린 아버지! 자식을 버리고도 30년 동안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던 아버지를 아이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수소문해서 대구 인근의 한 지방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는 불편한 몸으로 아버지 옷도 사고 맛있는 것도 사서 아버지를 찾아가 보살펴 드렸다고 하네요. 그러다 결국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고요. 그 아이는 그런 아버지가 밉지도 않았을까요? 아니면 연민의 정이 느껴졌을까요? 그런저런 일들이 있고 나서 얼마 전 그 아버지의 첫 기일이 다가왔고 그 아이는 불편한 몸으로 아버지를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해 제사를 올렸다고 하더군요. 온 몸을 비틀면서 겨우 자신을 표현하며 살다 보니 실제 자신의 나이보다 서른 살쯤은 더 들어 보이고 앙상한 뼈에 바짝 마른 그 아이. 다른 사람의 도움없이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마음만은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부자인 그 아이가 저에게는 정말 ‘날개 없는 천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