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일(토) 제1회 ‘대주교님과 함께하는 젊은이의 날’ 행사가 75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대구대교구청 내 교육원 대강당에서 있었습니다. 이날 행사 중에 진행되었던 젊은이들과 교구장 조환길 대주교와의 질의응답 내용을 교구 청년국(국장: 배상희 마르첼리노 신부, 차장: 구자균 다미아노 신부)의 도움으로 간추려 소개합니다. - 편집자 주(註)
질문자1: 찬미예수님! 저는 비다누에바 봉사자 남승현 미카엘입니다. 요즘 취업의 문제로 연애 결혼 인간관계까지도 포기하고 살아가는 청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여러 문제들로 복잡한 사회 환경 속에서 살다보니까 성당을 나오고 싶어도 성당을 못나가는 청년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하면서도 또 이렇게 힘든 시기를 보내는 청년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듣고 싶습니다.

조환길 대주교: 오늘날 이 시대에 가장 뜨거운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취업문제, 저도 참 안타깝습니다. 이렇게 취업이 어려우니까 연애도 해야 하고, 결혼도 해야 하는데 취업, 결혼, 출산 등을 포기한다는 3포시대라는 말도 있지요. 이렇게 어려운 시대에 우리 청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복음적 가르침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고 묻는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취업에 너무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취업이 다가 아니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이 직장을 구하는데 구해 줄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오늘날 취업문제뿐만 아니라 복잡한 많은 문제들이 우리나라에 있지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생존경쟁이 너무나 치열한 나라 같아요. 얼마 전 한 대학에서 설문조사를 했는데 오늘날 대학 생활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에 첫째는 외모지상주의, 둘째는 SNS의 폐해, 이 SNS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만나 친교를 이루고 만나야 하는데 인터넷으로만 관계를 맺고, 스마트폰으로만 대화를 하니까 문제가 많다고 봅니다. 셋째는 상대평가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절대평가를 하면 잘하는 사람은 잘하는 대로 하고 못하는 사람은 못하는 대로 하면 되는데 상대평가는 A는 몇 사람 주고, B는 몇 사람 주고, C는 몇 사람 줘야 하니까 그 과목에서 열심히 해도 잘 하는 사람이 많으면 자기는 C, D를 받아야 하는 거예요. 성적순으로 줄을 세운다는 거요. 상대평가에 이런 문제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아 ~ 일리는 있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만큼 우리 사회, 정부나 교육부, 대학도 그렇고 줄을 세우는 거예요. 이런 현상들 때문에 우리 젊은이들이 더 어렵지 않느냐하는 생각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수도권과 비수도권,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불평등한 대우가 너무 심한 나라이기에 더 어렵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그래서 더 높이, 연봉이 더 많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 취업에 매달리게 되고 매달리게 되니 결혼도 늦어지고 연애할 시간도 없고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 같아요. 이러한 것은 국가로서나 교회로서나 아주 좋지 않은 큰 손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부조리한 것들을 변화시키는 게 개인의 힘으로는 아주 어렵습니다. 나도, 여러분도, 요직에 있는 몇몇이 바꾸기에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결국 국민의식 자체가 바뀌어져야 하는데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나아져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어려운 현실에 오늘날 젊은이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위로의 말을 드리고 싶고, 그러면서도 우리가 신자로서 가톨릭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야 하지 않겠나, 성직자로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 신앙생활은 바로 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혼자서 신앙생활 하는 것보다 풍요로운 신앙생활을 하려면 제도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교회에 나와야 안전한 가르침과 더 풍요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은 이런 신앙생활을 바탕으로 그래도 이런 세상에 좀더 초연할 필요가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오늘날 이 불균형하고 물질, 돈이 지배하는, 외모지상주의 같이 겉으로 보이는 게 다인 듯한 세상에서 우리 신자들 만큼이라도 거기에 휘둘리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복음화 문제에서 가장 걸림돌이 세속화 문제예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2년 전에 발표하신 “복음의 기쁨”이라는 권고의 내용은 이러한 세속화 되어있는 현대 세계에서 어떻게 복음화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느냐 하는 내용이거든요. 세속화라는 것은 즉 물질주의, 개인주의, 쾌락주의 등으로 하느님 없이 신앙 없이 흘러가는 이 세태의 물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물결들을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하는 거예요. 가톨릭 신자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용기가 필요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이 역설적인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 조류를 따라 간다면 과연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뭐 있냐는 거죠. 그 가르침대로 가야 합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께서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윤리적 선택의 결과나 고귀한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내 삶의 방향을 이루고 삶을 변화시켜 주는 그분을 만남으로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내 인생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그분을 참으로 만났다면 그분의 존재와 가르침이 내 삶에 변화를 주기 때문에 아무리 취업이 급하고 어려움에 있다 하더라도 내가 바른 길을 갈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내가 세상을 이겼습니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질문자2: 안녕하세요? 저는 평리성당의 구경회 안젤라입니다. 저는 청년국의 많은 신앙 프로그램을 참여하면서 신앙을 다지고, 말씀과 함께 살아감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좋은 것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은 마음에 주변 사람들에게 피정이나 많은 프로그램 참여를 권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의 이런 권유에 대해 요즘 유행하는 이단에 빠진 게 아닌가 하며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는 다른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거 할 시간이 어딨냐며 눈총을 받기도 합니다. 좋은 것을 나누고 싶은 저의 진심이 다른 사람들에게 왜곡되고 의심받는 것에 상처를 받기도 하는데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다른 종교, 이단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오늘날에 저와 같은 젊은이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지키면서 가톨릭 신앙을 굳건히 지켜 나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여쭙고 싶습니다.

조환길 대주교: 첫 번째 질문이나 두 번째 질문도 우리 신앙생활에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인거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어려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듣고자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오늘 이 사회는 갈수록 그렇지 않겠나 싶어요. 다종교, 다문화 사회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 같은데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을 먼저 인정하는 것, 그런 포용과 관용의 자세가 필요하지 않겠나 싶어요. 평화를 이루는, 너와 나의 평화, 우리의 평화를 이루는 첫 번째 자세는 서로를 인정하는 것이에요. 너와 내가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니거든요. 그것부터 우리가 인정을 해야 하지 않나 싶고,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에 대한 가장 일차적인 자세가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하느님이 안계시다고 믿는 무신론자들도 그들의 견해가 있고 주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무신론자나 다른 종교인들에게 선교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오늘날 종교 간의 분쟁, 다툼이 인류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쳐 왔습니다. 대표적으로 중동의 IS 근본주의자들이 이라크의 정세가 불안한 틈을 타서, 시리아가 10년 이상 내란을 겪고 있는 틈을 타서 양쪽을 공격해 국가를 세웠어요. 그것이 이슬람 국가인데 지금 많은 사람들을 종교 때문에 죽이고 있어요. 코란이 아니면 칼을 받으라는 그 식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런 식은 있어 왔는데 큰 비극이죠. 그래서 이 세상에 평화를 이루는데 종교가 기여를 해야 하는데 오히려 종교가 분열을 일으키는 게 안타깝고 그렇지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그 종교를 믿는 사람을 억지로 개종시키지 말라 하셨어요. 내가 좋은 말과 표양으로 그 사람에게 하느님을 알리고 우리 종교의 좋은 점을 알리는 것은 좋은데 억지로 개종시키지 말라 하시는 거지요. 종교 때문에 다툼이 있어서는 안돼요.
내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광신자 같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버리면 좋겠고, 나는 내 신앙대로 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단은 좀 다릅니다. 신천지라든가 여호와의 증인, 하나님의 교회 등 이단들에 대해서는 단호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은 기존 종교의 교리나 성경을 자기들 교리나 목적에 맞게 해석을 해서 사람들을 현혹시킵니다. 나는 괜찮다 장담할 수 있지만 사람은 약하기 때문에 빠질 수도 있어요. 아주 멀쩡한 사람이 그런데 빠지는 거 보면 인간이 얼마나 약한가 하는 걸 볼 수 있어요. 가톨릭교회에는 성경의 가르침이 있고 교리의 가르침이 있는데 이걸 교도권의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교도권은 교황과 주교들의 가르침인데 이것은 공의회의 시노드를 통한 교도권의 가르침입니다. 이 교도권의 가르침에 가톨릭 신자들이 따라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을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하고 하면 이것은 개신교가 되고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성경이지만 자신들의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에 맞게 성경을 해석해버리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은 그만 넘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단은 아예 상종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톨릭교회가 2000년의 세월을 흘러 왔지만은 이단은 수없이 생겨났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초대교회 시대 때부터 수없이 생겨나고 없어지고 하는 것이 이단이에요. 지금의 이 이단들도 언젠가 사라질 거예요. 그렇게 휘둘려서는 안 됩니다. 가톨릭교회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입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는 말 중 사도라는 말은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는 뜻이지요.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는 거예요. 개신교처럼 갈려나가고 어떤 개인이 만들고 하는 교회가 아니라는 거지요.
예수님께서 사도들 위에 교회를 세우셨잖아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사도들이 교회를 이끌어 왔는데 그 교회가 오늘날 이 가톨릭교회다 하는 이야깁니다. 루터나 칼뱅 등 16세기에 자신의 해석에 따라 많은 개신교가 생겼지만 가톨릭교회는 사도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 교회라는 것이지요. 우리 신앙이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한 이후 내려오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고, 우리의 신앙을 지켜주고 있는 것이 바로 가톨릭교회라는 하나의 조직이지요. 우리 신앙이 이런 테두리 안에 있을 때 지켜지고 보호를 받는 거예요. 그래서 가톨릭 집안에 머물면서 우리 신앙을 지켜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질문자3: 청년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체 생활 중 선배나 후배에게 상처를 받거나 신부님이나 수도자들에게 상처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청년들이 많이 있는데요, 이런 일들로 지친 청년들에게 해주시는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조환길 대주교: 신부님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나 봐요? 신부님들에게 상처를 받았다면 제가 사과드립니다. 저 때문에 상처받은 일은 없겠죠? 우리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것 같아요, 그렇죠? 신앙인들 안에서, 신부님들 안에서 우리가 실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게 세상 아닌가요? 교회란 무엇입니까? 교회란 죄인들이 모여 있는 단체입니다. 죄인들의 피난처라는 말도 있어요. 깨끗한 사람들만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깨끗한 이들은 천국에 있습니다. 성인들의 교회는 천국입니다. 죄인들의 교회와 성인들의 교회가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이 성인들의 통공입니다.
제가 1972년에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들어가 살다보니 내가 생각했던 신학교가 아니었어요. ‘이 사람이 정말 신부님이 되려고 들어왔나? 정말 신부님이 되겠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 중에는 나간 사람도 있지만 사제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사제가 되고도 어떤 청년에게 상처를 받기도 하고 실망을 하기도 하고 안타까울 때도 있습니다. 내가 동료 사제에게 실망을 줄 때도 많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내가 여유를 좀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나 역시 실망을 줄 수도 있고 그 대상이 될 수도 있듯이 ‘저 사람도 그렇구나.’ 하고 인정하기, 기도해주기, 그래도 정 안되면 포기하세요. ‘그런 사람들도 있구나.’하고요.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 사랑할 수 없으니까요. 예수님도 다 사랑하진 못했을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에게 모진 말씀을 분명히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 세상 인간관계에는 어려움들이 많습니다. 모두가 다 나같지 않기에, 특히 남자와 여자는 더 다르고요, 그래서 그런 분들을 위해 더 기도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대답이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질문자4: 세상에 소외된 이들이 많은데 그들을 사랑하는 일이 가치있고 중요한 일이란 건 알지만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 소외된 이들은 누구 이며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세요.

조환길 대주교: 올해 우리 교구 사목 지표가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는 교회이고, 그 정신으로 살자고 했습니다. 2차 시노드 때도 이것이 한 주제였어요. 그런데 과연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누구인가? 루카복음에 나옵니다. 율법학자가 “그럼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하고 묻습니다. 이 질문을 하기 전에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했더니 “너의 마음과 생각과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합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면 “내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은?”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지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다 알지만 과연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나가서 강도 만난 사람을 찾아야 하느냐? 아닙니다. 내가 매일 만나는 사람,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이웃입니다.
지금 네팔 지진이 참 큰일인데 지금 우리가 달려가야 하잖아요? 하지만 우린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습니까? 정말 달려가는 훌륭한 사람도 있는데 나는 그렇게 못 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고 내가 돌봐야 할 사람도 있고요. 지금 내가 돌봐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이 현재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예요. 지금 당장 네팔을 가지 않아도 말입니다. 우리 집에 연세 있으신 부모님이 계시고 챙겨드려야 하는데 다른 시설에 봉사하러 나가는 게 맞을까요? 그건 이웃사랑이 아니잖아요. 지금 내 손길이 필요한 사람,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돌보는 것, 사랑하는 것, 그게 이웃사랑입니다. 큰 것이 아니에요.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오복음 25장 40절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중에 심판하실 때 기준이 무엇이에요? 네가 얼마나 이웃 사랑을 얼마나 잘 실천했느냐? 하느님을 믿는 것은 기본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보잘것없는 이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 그렇게 해주라는 거죠. 멀리 대단하게 생각할 필요없이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때그때 친절을 베풀고 도와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이웃사랑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질문자5: 주교님께서 청년들에게 바라시는 점,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기회를 더 자주 마련해 주실 수 있는지요?

조환길 대주교: 청년들에게 바라는 점이 굉장히 많아요. 그러나 많은 걸 다 얘기 할 수는 없고 오늘 여기 온 청년들을 생각하면 예쁘고 보기 좋습니다. 이 행사가 이번에 처음인데 나중에 평가해보고 고칠 부분이 있는지 살펴보고 계속 할지 말지를 결정하겠지만 여러분들이 원한다면 1년에 한 번씩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 성모당과 교구청에 처음 온 청년들도 꽤 있다고 해요. 청년들이 각 본당, 각 단체에서 활동하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또한 교회 안에, 교구 안에 함께 모여서 이런 시간을 가지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의 모습이라 함은 ‘교구’를 말합니다. 지역 교회는 교구를 말합니다. 하나의 본당은 교구의 한 조직이라고 할 수 있죠. 하나의 공동체는 교구를 말하는 것이기에 본당이 다르고 단체가 다르지만 1년에 한 번씩 이렇게 같이 모여서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논의하는 것도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평가 후 긍정적인 면이 더 많으면 내년에도 계속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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