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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정 선생의 교실이야기 2
굴참나무처럼


이유정(데레사)|계산성당, 무학고등학교 교사

 

우리 학교에는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을 찾는 “무학 산우회”라는 교사 모임이 있습니다. 매달 둘째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산을 오르며 자연 속에 몸과 정신을 잠시 풀어놓습니다. 휴식이 주는 평안함과 자연이 주는 싱그러움 속에서 그날 하루는 온전히 저만을 위해 시간을 씁니다. 숨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고통을 견딘 후 산 정상에서 눈 아래의 세상들을 만나는 순간 찾아드는 가슴 펑 뚫리는 쾌감은 정신없이 살아온 시간들이 만든 묵은 찌꺼기를 쉬이 날려 버립니다. 하지만 마음의 여유가 더 간절함과는 달리 3학년 부장을 맡으며 바쁘다는 핑계로 산우회원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번 여름방학이 지나면 정년퇴임을 하시는 우리 학교 생물 선생님은 리더로서 늘 팀원들을 살피십니다. 특히 산을 잘 못 오르는 저를 항상 팀의 제일 앞에 세우시고 제 속도에 맞추어 산행을 해주십니다. 특히 산행 시간이 길어지는 것이 제 탓인 것 같아 미안해 하는 절 위해 일부러 “아이고, 와이래 숨이 차노? 잠시 쉬어 갑시다.”라고 하시며 쉬는 시간도 마련해 주십니다. 또는 “괜찮나? 조금만 더 가면 바람 시원하게 부는 자리가 있으니 거기서 쉬자.”라고 하시며 산이 흔들릴 듯이 거친 숨을 몰아쉬는 제게 격려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특히 전공 실력을 살려 산을 오르는 동안 자연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십니다. 젊은 시절부터 산을 사랑하며 지내시는 <산사나이>이신 선생님께서는 스쳐 지나는 나무들과 풀들, 꽃들의 이름을 알려주시며 여러 설명들도 항상 덧붙여 주십니다.

몇 달을 쉬고 오랜만에 산에 오르는 저는 그날도 심하게 헉헉거리고 있었습니다. 쉴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저를 보신 선생님께서는 잠시 휴식타임을 부르신 후 제가 짚고 선 나무를 가리키며 “굴참나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연이어 굴참나무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코르크 껍질이 있어 산불이 나도 오래 견딜 수 있다는 설명이 인상적이었던 저는 손가락으로 지그시 나무의 거친 표면을 눌러보기도 했습니다. 일행 중 사회선생님께선 어린 굴참나무는 죽지만 오래된 굴참나무가 가장 나중까지 살아남더라고 하시며 실제 경험담까지 덧붙여 주셨습니다. 잠시 후 정상에 오른 산우회 회원들은 총무이신 지리선생님께서 더운 날씨에 김밥이 상할까 걱정이 되어 손수 밥을 지어 일회용 도시락에 담아 온 정성된 점심을 먹은 후 우리 팀은 즐겁게 산을 내려왔습니다.

자연 속에서 복잡한 일상을 잠시 내려놓았던 그날! 제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오랜만에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스승의 날은 바쁘실 것 같아 어버이날로 당겨서 인사드린다며 집 근처에 와 있다고 했습니다. 학교 다닐 땐 무던히도 속을 썩이던 녀석은 벌써 애아버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요즘은 자기처럼 애먹이는 녀석이 없냐는 질문에 “와 없겠냐”며 요즘 저를 힘들게 하는 우리 반 애물단지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후 녀석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한 마디 툭 내뱉었습니다. “우리 엄마 살찌지 말라고 그러나보네. 걱정마요. 지금은 몰라서 그렇지, 지도 나이 먹으면 다 알게 돼 있어요. 일찍 바닥을 경험했으니 빨리 일어날 거예요. 나 봐요. 그 녀석도 곧 알게 돼요.” 그러고선 마치 어른인 양 제 어깨를 툭툭 치며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우리 쌤은 큰 나무잖아요. 히히!” 저는 그 말을 들으며 산에서 본 굴참나무가 다시 한 번 떠올랐습니다,

집에 도착한 저는 계속 머리를 휘젓고 다니는 굴참나무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봤습니다. 경기도 지방에서는 ‘골’을 ‘굴’이라 했는데 껍질에 ‘굴(골)이 지는 참나무’라 해서 굴참나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굴참나무는 껍질 속에 부드러운 속살을 갖고 있지만 겉으로는 거칠고 투박한 수피(樹皮)를 갖고 있어 외부의 시련에 강하다고 합니다. 생명력이 강해 나무 수령이 15년 정도 지나면 코르크 껍질이 약 1㎝ 정도로 두꺼워지는데 이때부터 코르크 껍질을 벗겨낼 수 있답니다. 특히 껍질을 벗겨도 약 8~9년이 지나면 다시 두꺼운 껍질이 생겨 수령이 약 40이 될 때까지 계속 벗겨낼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굴참나무를 조사하며 이 시대의 교사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떠올랐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구황식물의 역할까지 톡톡히 하는 굴참나무는 도토리 열매로, 코르크 껍질로, 그리고 수액으로, 살아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계속 내놓기만 하는 나무였습니다. 마치 끊임없이 주기만 하는 우리 교사들의 모습처럼! 교사의 권위가 나날이 실추되고 있는 현실을 사는 우리 교사들은 그 따가운 시선들 속에서도 묵묵히 학생들에 대한 사랑으로 매일 매일 늙어갑니다. 해가 갈수록 표면이 더욱 거칠어가는 굴참나무처럼! 언젠가 학생들의 교사 평가에서 낮은 점수가 나와 교육청 연수를 들으러 오신 어느 노(老) 선생님께서 나이가 들면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좋아하지 않아 담임도 안 시킨다며 쓴 웃음을 지으시는 모습을 보며 저도 나이가 많아져서 담임을 못하게 되면 어쩌나 걱정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 젊게 살려고 지금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늙는 것은 자연의 섭리임에도 불구하고 늙는다는 것은 이렇게 슬픈 것이 되는가 봅니다.

자료를 찾다보니 서울 신림동에는 수백 년 넘게 생명을 유지하며 역사를 지켜온 천연기념물(제271호) 굴참나무가 있었습니다. 늙음이 귀함이 되기보다 뒷방 늙은이의 고루함으로 치부되는 현대 사회 속에서 거목으로 도시 한복판을 지키고 있는 나무의 모습은 오히려 위대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정년퇴임을 앞두고 계신 우리 학교 선배 선생님들의 모습이 그 나무 위로 클로즈업 되었습니다. 이번 1학기가 끝나면 온전히 학생들을 위해 한 평생 평교사로 사시며 쉼 없이 달려오신 우리 생물 선생님도 떠오르고, 내년 2월이면 자신의 전부와도 같았던 이 학교를 떠나야 하는 우리 교장 선생님도 떠올랐습니다. 생물 선생님은 지난 6월 6일 교내 모자(母子) 산행을 위해 쉬는 토요일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산행 인솔을 기꺼이 맡아 주셨습니다. 이 글을 쓰는 오늘 아침에도 교장 선생님은 기숙사와 형설반 학생들의 아침자습 지도를 하시기 위해 새벽 6시 50분쯤 기숙사 앞에 서 계셨습니다. 그 오랜 시간 내내 단단하게 서 계시며 내놓는 삶들을 살고 계신 이 분들의 삶이 꼭 서울 신림동에 외롭지만 우뚝 서서 그 넓은 팔을 벌리고 서 있는 거목 같습니다.

이분들이 떠나는 그 자리에 우리들도 곧 서게 되겠지요. 그리고 이제 시작하는 젊은 청춘들도 어느 순간에는 이 거목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 교사들은 저 굴참나무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하게 교단에 섭니다. 아름다운 거목의 삶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