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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정 선생의 교실이야기 2
꼴찌와 첫째


이유정(데레사)|계산성당, 무학고등학교 교사

 그렇게도 모두가 간절하게 그리던 비가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습기로 온몸이 꿉꿉한 느낌이 들어도 간만에 찾아와 턱턱 갈라진 논바닥, 밭고랑을 흥건하게 적셔주는 빗줄기가 고마워 연신 비오는 밖을 쳐다보게 됩니다. ‘메르스’란 못된 손님의 방문으로 모두가 정신없이 허둥대는 동안 ‘메르스’보다 더 무서운 수능을 눈앞에 둔 고3들은 한결같이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EBS 알파벳 세 개가 큼지막하게 적힌 책들과 엉켜서 치열하게 고되게 싸움질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꼴찌가 아니라 지금 서 있는 자리보다는 더 높은 곳을 향해.

저는 ‘지식체널e’를 활용한 아침 조례를 합니다. 이름은 ‘지식’이라고 나오지만 저는 지혜를 배우는 시간이라고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짧지만 귀중한 5분.” 그래서 저는 공부하던 책도 연필도 놓아달라고 아이들에게 부탁합니다. “아무리 공부가 급해도 긴 인생을 위해 이 5분은 모두 고개를 들어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착하디착한 우리 반 아이들은 대다수 제 말을 들어줍니다. 몇몇은 그래도 아직 제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기도 하지만.

그날 볼 영상은 미래의 광고 작가를 꿈꾸는 학생이 급우들의 의견을 수렴해 선정합니다. 며칠 전 영상은 ‘누가 영웅이 되는가?’였습니다. 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한 시민, 목숨을 걸고 유태인을 숨겨준 독일인, 흑인의 인종 차별에 백인,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위해 싸우는 전직 이스라엘 군인 등 유리한 생존의 길을 포기하고 영웅이 된 사람들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물음표를 던졌습니다. ‘모든 영웅이 가진 비밀 성분은 무엇일까?’ 이 영상을 만든 다큐멘터리 작가는 영웅의 비밀을 캐기 위해 2년간 세계 여러 곳을 돌며 영웅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영웅이 될 수 있는 자질은 무엇일까요?” 그런데 그 영웅들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면 당연히 돕는 것은 인간의 도리잖아요?”

 꼴찌가 첫째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인간의 도리 앞에서 언제나 첫째인 사람들이 진정한 영웅임을 힘주어 말하며 아침 조례를 끝낸 후 교무실에 돌아왔지만 하루 종일 이 화두는 제 뇌리를 빙빙 돌며 제게 되묻기를 계속했습니다. 사실 모두가 위대한 영웅이 될 필요는 없지만 앞 다투어 높은 자리, 좋은 몫만을 향해 모두가 하나 되어 달려가는 현실 속에서 “우린 과연 얼마나 아이들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 마땅한 인간의 도리에 대해 얼마나 이야기하고 있는가? 우리 아이들이 진정한 첫째가 되기 위해 해야 할 것은 뭘까?” 고민은 그날 밤늦은 시간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고민에 빠질 때마다 정말 ‘이미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지.’라고 말씀하시며 우리 주님은 준비해 두신 선물을 살포시 던져주십니다. 밤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마지막으로 교실을 한 바퀴 돌며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한 후 교무실 제 자리에 앉은 저는 온종일 제 뇌리를 떠나지 않는 물음들을 떠올리며 망연히 창문 밖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진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언제나 그 곳에 있었는데 그 순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반가웠습니다. 교황님의 미소를 보며 “우리 교황님도 또 한 명의 영웅이시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황님 사진 옆에는 교황님의 새해 결심 10가지가 적혀있습니다. 그 활자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제 시야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연이어 아침에 영웅들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저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칠 궁리를 할 것이 아니라 우리부터 먼저 그 자질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스스로에게 되새기며 ‘평범함 속의 위대함’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1.험담하지 마십시오. 2.음식을 남기지 마십시오. 3.타인을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4.겸손하십시오. 5.가난한 이들을 가까이 하십시오. 6.사람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7.생각이 다른 사람과 벗이 되십시오. 8.투신하는 것을 두려워 마십시오. 9.주님을 자주 만나 대화하십시오. 10.기쁘게 사십시오. 이 10가지 항목을 읽고 또 읽으며 제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봤습니다. 부끄럽게도 자신 있는 항목이 별로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제게 깨달음을 또 던져주십니다. 남을 가르치려고 하기 전에 너부터 먼저 하라고!

저는 매년 교우도 조사를 합니다. 아이들이 만든 항목이라 재미있는 것도 많습니다. 교우도 조사를 하다보면 친구들에게 신뢰를 얻는 학생을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올해도 예외 없이 실행했습니다. 고민 상담을 잘 해주는 친구, 가장 신뢰감이 가는 친구 두 항목 모두 최다득표를 한 한생이 있었습니다. 학급 칭찬하기 프로그램 때도 이 학생은 많은 표를 얻었습니다. 그 학생을 조금 더 가까이서 살펴봤습니다. 고3이라 모두들 바쁜데 자기 학습시간이 손해가 나더라도 공부 안하는 친구를 찾아가 옆에 앉아 공부하게 하고 심부름을 시키려면 자신이 하겠다고 남보다 먼저 손을 들고, 청소당번이 따로 없는 우리 반에서 먼저 빗자루를 드는 이 아이를 지켜보며 참 좋은 어른이 될 것 같아 저도 행복해졌습니다. 분명히 이 아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첫째의 자리에 앉게 되겠죠.

 지난 스승의 날에 “쌤! 보고 싶어요. 쌤은 내가 안 보고 싶어요?”라며 늦은 밤에 저를 불러낸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그래도 저 보고 싶다는 녀석들의 말이 참으로 따뜻해서 기다리는 장소로 한달음에 달려갔습니다. 마흔이 다 되어가는 녀석들은 케이크에 초 하나를 꽂아놓고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부른 후 제게 커다란 온몸 하트를 날려주었습니다. 그들과 술자리를 같이 하는 중에 체육관을 운영하는 녀석이 어려운 아이들 있으면 자신이 직접 상담도 하고, 고민도 들어준다며 자신도 선생님이 되니 선생님들 생각이 더 난다며 연신 “고맙습니다!”하고 인사했습니다. “쌤요,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공부는 좀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렇게 선생님들 은혜 안 잊고 살아요. 우리가 더 낫지요?”라며 너스레를 떠는 녀석들을 보며 감사할 줄 아는 어른으로 자라줘서 참 고마웠습니다.

사실 꼴찌나 첫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가 한 일은 특별했지만 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한 영웅의 말처럼 모두가 마땅히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에 첫째가 되고자 노력하는 세상이 온다면 곧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저부터 바뀌어야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는 루카복음 6장 31절의 말씀처럼 사는 그날을 꿈꾸며, 꼴찌가 첫째 되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