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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몬시뇰의 세상이야기
물따라 세월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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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베네딕도) 몬시뇰

우리는 신의주에서 피난 기차를 탔고, 기차는 남쪽으로 달렸다. 이제 조선 땅에 왔다는 생각에 한결 마음이 놓인다. 달리는 기차에서 밖을 내다보니 낯익은 산하며, 집들하며, 확실히 조선임에 틀림없다. 남쪽으로 갈수록 가끔 역에 정차하니, 사람들이 기차에 탔다. 그들이 하는 말은 도무지 우리가 알아듣지 못할 소리들이었다. 인민위원회니, 자치단체니, 자위대, 점령군, 붉은 군대 등 생소한 단어들이 즐비하다. 그런 것뿐만 아니라, 기차를 탄 사람들의 대화 내용 또한 도무지 알아듣지 못할 것들이다. “일본 놈들보다 더 해!” “전부 다 뺏어간단 말이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북조선의 변한 모습을 이야기하니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었을 수밖에. 소련군들은 가는 곳마다 물건을 빼앗고, 부녀자들을 강탈했기 때문에 일본사람들보다 더 나쁘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저러나 만주에서 지금 나온 우리는 아직 꿈속에 살고 있었다.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독립이 되었다. 일본인들은 갔다. 이제 자유다. 일본사람들이 빼앗아가던 쌀도 이제 공출하지 않아도 된다. 징용도, 군대도 안가도 된다….’ 해방을 한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방’이라는 낱말의 뜻도 처음에는 몰랐다. 차창 밖으로 비치는 북조선 거리는 그래도 정다웠다. 가끔 붉은 글씨로 쓴 ‘김일성 장군 만세’라는 플래카드도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기차는 평양에 도착했고, 사람들이 많이 내렸지만 아직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멀다. 많은 사람들이 내렸기 때문에 이제 발을 뻗칠 여유도 생겼다. 피난민 기차라서 그런지 역원들은 기차를 타려고 하는 사람들을 못 타도록 막았다. 그런 와중에도 한두 사람은 요리조리 피해가며 기차를 탔다. 그 사람들이 입은 옷은 깨끗한데, 우리들은 거지 중에도 상거지 차림이다. 한달 넘게 옷을 갈아입지 못한 꼴이 어찌 여행하려고 차려입은 사람들의 옷과 같을 수 있을까. 그러던 중 기차는 또 떠났다.

 

그중 한 사람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어디까지 가요?” “대구요.” “대구가 고향이요?” “그렇소.” “다시 평양에는 오지 않소?” “아니요.” “그럼, 대구가면 거기 살겠네요.” “그렇습니다.” “우리도 남쪽으로 가고 싶은데….” “그럼, 가지요.” “못 가게 해요.” “왜요?” “북쪽에 살으래요. 지금 북쪽은 김일성이 통치하는데 남쪽과 통일한데요.”

 

일본이 미국 진주만을 공격할 때, 이미 소련과 일본은 불가침조약이 맺어져 있었다. 그래서 일본은 당연히 소련이 자국을 침략하지 않을 것으로 오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미국이 일본 본토를 압박하기 시작할 때 소련은 이미 독일과의 전쟁에 이기고 있었기 때문에 여유가 생겼는지 소련은 일본과의 불가침조약도 무시한 채, 일본이 지키고 있는 만주를 침공하였다. 그리고 만주를 건너 북조선까지 침공을 가한 것이다. 이미 얄타회담에서 스탈린과 루즈벨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한국을 반으로 가르기로 약속했다고 들었다.

 

그것도 저것도 모르는 우리는 일본이 패망한 것만 좋아라 하고 마치 독립이나 된 것처럼 들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과 소련은 우리 나라에 38선이라는 금을 그어 남과 북으로 갈라놓았던 것이다. 초기에는 38선 근방에 사는 농민들에게 남쪽과 북쪽의 왕래가 허락되었다. 우리가 피난을 와서 38선을 넘을 때까지도 가끔은 왕래가 있었던 것 같다.

 

기차는 신막을 지나 남쪽으로 더 가는데 지금 지나는 곳이 남천이라 한다. 남천에서부터는 각자 갈 길을 알아서 가라고 했다. 오면서 들은 이야기로는 38선 남쪽에는 미군이 있고 북쪽에는 소련군이 있단다. 사람들은 서로 오도가도 못하고 기차도, 도로도 막혀 있단다. 우리는 남천에서 내렸다. 달구지를 또 사서 타고 임진강 나루터 근처 여관까지 갔다. 거기서 저녁을 먹고 좀 쉬다가, 소련군의 순시가 끝난 후 초소로 들어가는 밤 12시 이후에 임진강 나루터에서 배를 타려는 것이었다.

 

밤 1시쯤, 배를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배를 타고 갈 때, 만약 무슨 소리가 나면 소련군이 총을 쏜다고 했다. 특히 어린 아이 울음소리는 안 들리게 하라는 말도 있고 해서 우리는 조용히 배 밑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배가 닿는 곳은 아직 남쪽이 아니었다. 거기서 산을 하나 넘고, 그 다음 산 정상이 38선이다. 산 정상에 올라가니 꽤 넓은 풀밭이 있었고, 그곳에는 많은 아낙네들이 국밥장사를 하고 있었다. 38선 이남이라는 말에, ‘이제는 살았구나.’ 하며 모두 풀밭에 주저앉아버렸다.

 

한밤중에 배를 타고 새벽에 내려서 산을 하나 반이나 걸어 넘어 정상에 왔으니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팠지만,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에 한꺼번에 맥이 풀리는 듯 했다. 수십 명이 늘어앉아 파는 것이라야 콩나물국에 밥 한 그릇이었지만, 풀밭에 주저앉거나 누웠다가 허겁지겁 주린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피난 온 사람들은 거의 서넛이나 대여섯 명이 무리를 이루고 왔는데 유독 한 할아버지는 배낭을 메고 홀로 눈치를 보며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일본말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너, 일본말 할 줄 아니?” “네.” “그럼, 여기가 38선 이남이냐?” “지금 여기서부터는 38선 이남입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는 “아, 이제 살았다.”라고 일본말로 외치며 그 자리에 털썩 드러누워버렸다. “아! 나는 살았다! 아! 나는 살았다!”고 소리지르는 것을 보았다. 그 할아버지는 평양의 어느 공장에서 식구와 함께 일을 하다가 8.15 종전 이후 그날부터 매일같이 불려 다니며 고초를 당했다고 한다. 처와 딸은 소련군에게 뺏겨버리고 아들은 자위대에서 조사한다고 데려가서는 생사불명이라 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밤에 몰래 도망쳐서 남쪽으로만 향해 걸어왔단다. 밉지만 불쌍하기도 하고, 가여운 마음에 콩나물 국밥을 사주었더니 그렇게 맛있게 먹을 수가 없었다.

 

밥을 먹고 산을 내려가다 보니 큰 길이 보이는데 ‘개성’으로 향한단다. 개성역에서 줄을 서서 서울로 가는 피난열차를 탔다. 피곤했던지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경성역(서울역)이었다. 불과 서너 달 전에 이곳에서 기차를 타고 해북진으로 들어갔는데, 역은 변하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옛날 같지 않았다. “갈 곳 없는 피난민들이나 혹은 더 남쪽으로 가야 할 사람들은 이쪽으로 모이시오!”하는 방송이 들려왔다.

 

우리는 성북동 외삼촌집으로 가기로 했다. 집에 들어가니 외사촌 내외분이 반가워하면서도 너무나 놀란 표정으로, 우리를 들어오라는 말도 하기 전에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두 달 동안 씻지도 못하고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아무 데서나 잤기 때문에 거지도 그런 상 거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목욕탕을 가야 하는데, 당연히 목욕탕에서는 이 상태로 가면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아서 물을 데워 우선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난 다음, 목욕탕에 갔다.

 

해방이 된 다음, 나의 생애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