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존 쉘비 스퐁 지음, 김준우 번역, 2001년, 한국기독교연구소), 이 말은 영국 성공회 감독이 지은 책의 제목이다. “유배기 이후에도 교회의 이런 기능(주일예배, 유아세례, 혼인예식, 병자성사 등)들이 계속될 것이며, 사람들이 일요일에 참석할 교회가 있을 것인가? 교회라는 기관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유신론적이며 개입하는 하나님의 개념이 사라진 마당에 교회에 어떤 목적이 있는가? 분명한 것은 교회가 마치 그 원동력이 된 전제들이 여전히 손상되지 않은 것처럼 계속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만일 교회가 유배기 이후에도 살아남으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한가? 교회 예배는 어떻게 바뀔 것이며 건물은 어떤 식으로 바뀌어야 하는가? 만일 우리가 더 이상 하늘에 계신 아버지, 즉 무엇이든 잘못된 것을 고쳐주며 우리의 행동에 따라 우리에게 상벌을 내리는 하늘 아버지와 예배를 통해 관계되어 있는 척 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교회라 부르는 건물에 미래가 있을 것이며, 그 건물 안에서 해왔던 예배와 의식들에 미래가 있을 것인가?”(같은 책 219면)
여기서 ‘유배’라는 말은 기원전 6세기 유다가 바빌론의 유배를 당했던 것처럼 오늘의 많은 신자들이 기존의 전통적인 하느님 개념과 성경의 문자적인 해석, 그리고 전통적인 교회 구조에 매여 있는 한 더 이상 하느님을 만날 수도 없고 예배할 수도 없게 된 기독교 신자들, 즉 기존의 교회를 떠나거나 유배를 당한 신자들을 말한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직자의 새로운 예복, 왕과 같은 예복을 버리는 것, 혹은 전혀 예복을 입지 않는 것에 관해서도 심사숙고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심지어 오늘날의 종교적 세계 속에서 새로운 의식이 생겨나고 있으며, 새로운 하나님 개념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표징들이다. 이런 증거들은 확실히 하나의 결론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이런 모든 변화들을 추진하는 힘이 과거의 유신론적 하나님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의식이 싹트고 있으며, 또한 그 죽음과 더불어 인간이 예배를 통해 그 초자연적이며, 세상 속에 침입적이며 초월적인 신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만일 예배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유신론적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멈추고 말 것이다. 만일 교회가 사람들에게 저 위에 계신 외부적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가리키는 것 이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다면, 교회는 마침내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같은 책 229면)
그는 또 말하였다. “오늘날의 제도적 종교는 내면적으로 와해되면서 외적으로도 갈라지고 있다. 선택의 길은 분명하다. 즉 종교가 유배지를 넘어 미래로 나아가든가 아니면 죽든가,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예배자들은 이미 전통적 용어들이 더 이상 그 문자적 진리를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이미 교회생활로부터 출애급을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 안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이러한 고어체 형태를 유용한 개념으로 바꾸기 위해 애쓰고 있다. 마침내 이처럼 예배에서 뜻도 통하지 않는(nonsensical) 개념들을 중얼거리는 관습 때문에 교회의 생사가 걸린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죽는 길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게 될 때, 실질적인 변화는 불가항력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변화의 힘이 마치 절벽에서 떨어지듯 쏟아질 것이며, 미래 교회와 미래를 위한 예배형태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같은 책 235면) 그리고 그는 확신으로 말하였다. “머리가 거절하는 것은 결코 가슴이 예배하지 못한다.”(같은 책 14면)
모든 기독교의 미래를 걱정하고 제시하는 저자의 생각에 많은 무리와 극단적인 해석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그러나 오늘의 교회가 변하지 않으면 죽어 버리고 말 것이라는 한 가지 사실에 대한 확신에 많은 공감과 동의가 따른다.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지나친 걱정과 냉소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구라파 교회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쇠퇴했다. 성소의 심각한 위기를 비롯하여 단 2%만의 신자들이 교회를 찾고 있으며 노쇠현상을 일으키면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확실한 것은 교회도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 교회의 죽음처럼 충격적인 일을 성경이 전해주고 있다.

“기원전 626년에 예레미야가 등장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 누구도 예루살렘 도성을 빼앗기고 성전이 파괴되리라는 예언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성전, 땅 위에 있는 도성에 토대를 둔 삶을 살고 있었고 거기에 인생의 의미를 부여했다. 보통 사람들의 마음에서 하느님은 예루살렘과 다윗 임금과 결합되어 있었다. 선택된 도성인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선택했기 때문에 침범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이사야 시대에 산헤립이 마지막 순간에 예루살렘의 포위를 풀고 철수했을 때 이 신학이 확증되었다. 이 신학만이 유다가 망했을 때 바빌론에 맞서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사람들의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설명해 준다. ‘뽑고 허문다.’(예레 1,10)는 예레미야의 사명은 이 신학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는 성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성전에 매여 있지 않다는 것, 그분이 과거에 실로를 파괴한 것처럼(1사무 4,1-22 참조)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할 수 있고 파괴하시리라는 사실을 설교를 통해 상기시켰다.”(예레 7,1-34 참조 / 예언서, 빈센트 P. 브래닉 지음, 임숙희 옮김, 바오로 딸, 235-236면)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루카 13,34-35)
또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루카 19,41-44) 예루살렘 성전 불가침성에 젖어 있던 유다인들에게 이만저만한 충격과 실망이 아닐 수 없었다.
“대구대교구,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충격적이고 의아스럽게 들릴 수 있는 말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죽어가는 교회를 살리기 위하여 개최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복음화’ 내지 ‘새로운 복음화’를 역설하였다. 만일 교회가 ‘복음화’ 내지 ‘새로운 복음화’를 이루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구라파 교회가 망해가는 것처럼! 어찌 대구대교구만 예외일 수가 있겠는가? 대구대교구도 ‘새로운 복음화’의 ‘새로운 열정’과 ‘새로운 표현’, 그리고 ‘새로운 방법’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모색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대구대교구의 미래를 살리는데 마음과 뜻을 모으자고 간절히 호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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