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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에 가다 - 순교 복자 구한선(타대오) 묘를 찾아서
모진 매질에도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젊은 순교자 구한선


박철수(보니파시오)|경산성당

 

병인박해(1866년) 때 순교하신 분으로 지난해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방한 때 시복되신 124위 중 마산교구의 다섯 분의 복자 신석복(마르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 정찬문(안토니오, 병인박해 때 순교), 박대식(빅토리아노, 1868년 무진박해 때 순교), 윤봉문(요셉, 1888년 봄 순교) 순교자들의 묘지를 순례하면서 구한선(타대오)의 묘를 찾아보게 되었다.

찾아가는 길이 쉽지 않아 성지담당 성당인 함안 대산성당을 먼저 찾았다. 마침 본당 신부님과 신자들이 행사를 준비하는 중이라 성당에 계셨다. 인사를 드리고 이렇게 성지를 찾아오게 되었다고 말씀을 드리니 신부님께서 복자 구한선(타대오) 순교자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성지를 새로 개발하고 성역화 사업을 한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 채 완성되기도 전에 성지 아래에까지 공장들이 들어와서 성지 이전에 대한 걱정을 들려 주셨다. 거제에 있는 윤봉문(요셉) 순교 복자 묘지가 생각났다. 옥포에서 지세포로 이장하였던 것을 도시가 커지고 공장이 세워지고 주거지역이 확장되면서 산골깊이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은 곳에 모셔져 있던 순교자들의 무덤과 유해들이, 교회의 재정과 무관심 속에 옮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되어 버렸다. 살아 생전 이교도들의 박해를 피해 포졸들의 눈길을 피해 오랏줄을 피해 이리저리 숨어 다니셨는데, 죽음 이후에도 썩은 육신마저 몇 번이고 옮겨 다녀야 하는 불편함을 겪게 하는 못난 후손들을 용서해주십사하고 청해본다.

앞으로 우리의 소중한 보물인 성인, 복자들의 유해를 평안히 쉬실 수 있도록 잘 보존할 수 있게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성당에서 가르쳐 주는 대로 새로이 조성된 도로와 공단(공업단지) 사잇길을 거쳐 조그마한 공장 모퉁이를 돌아서니 ‘구한선(타대오) 순교자 성지입구’ 표시 푯말이 서 있었다. 포장이 되지 않은 500평 남짓 되는 주차장은 순례자들을 기다리고 있듯이 다 비워놓았다. 마침 뒤따라 들어오는 승용차 한 대에 다섯 분의 자매님들이 차에서 내리면서 성지를 찾아오는 길이 어려웠다는 푸념을 하면서 몇 번인가 차를 세워 놓고 물어물어 찾아왔다는 것이다. 한손에는 묵주를 다른 손에는 성지순례 안내책자를 들었다. “찬미 예수님! 어디서 오셨나요?”, “저는 대구에서 왔습니다.”, “아! 저희들은 광주에서 왔습니다.”, “아유, 멀리서 오셨네요. 좋은 성지 순례되세요.” 인사를 나누면서 하느님의 자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금방 형제자매로 스스럼없는 관계가 되어진다. 이것이 하느님의 백성이 된 우리의 본 모습이 아닌가.

순교자의 묘소가 있는 곳은 주차장에서 서쪽으로 약 100미터 거리에 있다. 이런 저런 대화를 하다 묘소 입구에 다다랐다. 묘지 입구 왼편에서부터 안내글, 성지순례기도 순서, 묘지 가운데 제대. 뒤편에는 대형 십자가와 묘지 뒤편에 14처가 세워져 있다. 순교 복자 묘지 앞에서 기도를 바치고 절을 두 번 올리고는 둘러보았다.

 

묘지 입구 왼편에 세워진 성지 소개 글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순교 복자 구한선(타대오)는 경상도 함안 미나리골(현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그는 어느 날 우연히 천주교 신자를 만나 교리를 듣고, 즉시 이를 받아들여 교리를 배운 뒤 성 다블뤼 주교(Daveiuy, Marie Anthome Nicolas, 1818-1866년, 安敦伊, 순교자 성인, 병인박해 순교)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른이 된 후 소촌(文山) 교우 촌에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가 병인박해 직전에 리델(Ridel Felix clair 1890-1884년, 李福明 주교, 순교자, 성인) 신부의 복사로 선택되어 고성, 통영 교우촌을 지나 거제도까지 전교여행에 동행하였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집에서 지내던 중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관아로 압송되었습니다. 그는 관장 앞에서 갖가지 문초와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옥에서 주요 교리를 설명한 글을 적어 관장의 부인에게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더욱 혹독한 형벌을 받고 죽음 직전까지 간 뒤에 석방되었지만 집에 돌아온 지 7일 만에 장독으로 인해 선종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하기리의 ‘신씨’들의 묘소 한 구석에 묻혔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1959년 당시 함안 본당 주임신부였던 제찬국 신부님과 신자들의 노력으로 고향 인근 하기리에서 순교자의 묘를 찾아 1976년 현재 위치한 평림리 가등산 자락으로 이장하였습니다.

대산본당은 2002년 5월부터 마산 교구의 대표적인 순교자 중 한 명인 구한선 타대오의 묘를 새롭게 단장하고 성역화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해 9월 18일 묘지 축복식을 갖고 부대시설과 십자가의 길, 야외 제대, 순교현양비, 대형 십자가 등을 설치해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구한선 타대오는 2014년 8월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로 탄생되었습니다.>

 

대산성당에서 보여준 팸플릿 내용 중에 일부를 보면 이렇다. <효성이 지극했던 교회의 일꾼이라는 제목으로 구 타대오는 진주에서 체포되어 관아로 압송되었다.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아프다.’는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이에 관장은 ‘제대로 매질을 못한다.’고 형리들을 꾸짖자 형리들은 “제대로 매질하는 것입니다. 만일 더 때리면 죽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관장이 이번에는 타대오를 향해 “어찌하여 아프다는 소리 하나 내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늙으신 어머니가 문 밖에 있을 터인데 만일 신음소리를 내면 어머니가 이를 듣고 기절하실 것이므로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 또 관장이 “그러면 어찌하여 천주교를 신봉하느냐?”고 묻자 타대오는 “부모에게 효도를 가르치므로 천주교를 신봉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우리 한국 교회는 이분들의 시복시성을 위하여 꾸준히 기도하고 있는데 대산성당의 복자 구한선 타대오의 시성기도를 보면 가슴에 와 닿는 부분이 많아 함께 기도해 보았으면 한다.

 

주님, 구한선 타대오 복자를 저희에게 보내시어

굳은 신앙과 지극한 효성을 본받게 해 주시니 감사하나이다.

함안 대산 미나리 골에서 태어난 구 타대오는

선교사의 복사로서 경남지역을 동행하여

복음 선포에 이바지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습니다.

포졸에게 체포되어 온갖 문초와 형벌 속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모친의 안녕을 염려하여 신음소리를 죽이고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당당히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주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젊음을 접고 순교를 택한

복자 구한선 타대오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이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하시고,

저희가 그들의 숭고한 순교 정신을 따르며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 순교자들의 어머니이신 성모마리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124위 복자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복자 구한선 타대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