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레오 13세는 정당하게 자기 시대의 ‘ 성령의 망 각(Geistvergessenheit)’을 비판하였다. 성령에 대한 회칙 〈Divinum illud munus(1897)〉에서 그는 “그리스도인이 종종 성령에 대한 빈약한 인식만을 가지고 있음”을 유감으로 생각하며, “그의 이름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심행위 안에서 그렇게 자주 입술에 오르내리지만, 성령에 대한 신앙은 짙은 어둠으로 덮여 있다!”1)라고 말했다. 이런 시대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은 이제까지 신학 안에서 간과되었던 성령론의 특수한 위치를 인정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해서 성령의 망각은 그리스도교 신학들의 운명적인 주제로 여겨지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새로운 신학 논문들 또한 신학과 교회 안에서의 이러한 성령의 망각을 드러내고 있다. 먼저 미국에서 잊혀진 성령을 뜻하는 《The Half-Known God(반만 알려진 하느님)》이란 제목의 책이 출판되었는데, 여기에서 성령은 그리스도교 신학 안에서 소홀히 취급된 의붓자식으로 여겨졌다. 성령론은 1957년에 이르러서는 소홀히 여겨지다 갑자기 유명하게 된 주인공 신데렐라에 비유하여 신데렐라 이론(a Cinderella Doctrine)으로 표현되기도 했는데, 사람들은 성령이 성령강림 때처럼 교회력의 한 주일에만 중심에 서 있기 일쑤라는 것과 교회에 오가는 신자들 스스로 성령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잘 모르고 있으며,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의 일상적인 생활에 있어서 성령은 특별히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유감으로 여겼다.
교회는 그리스도론을 너무 강조하였고, 또한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성령론적인 국면을 소홀히 하였다. 그 때문에 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 골고루 관계되어 이해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도와 대리로서 그리스도 한쪽으로만 치우쳐 이해되었다.
다음의 글들은 우선 교부학에서 시작하여 트리엔트 공의회를 지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신학 안에서의 성령에 대한 이해를 개략적으로 고찰한다. 이 글들은 특별히 교회론과 성사론 안에서 성령에 대한 주의가 부족하였음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성령에 대한 교회의 이해는 특별히 이 두 영역 곧 교회론과 성사론 안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 성령론적인 관점에서의 교부들의 교회론
하나의 체계적인 교회론을 교부들에게서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들은 교회론적인 글들을 썼으며, 그 글들은 언제나 우선적으로 교회에 대한 성서적인 관념들과의 관련 안에서 작성되었다.
교부들은 교회를 전체 그리스도교적인 구원경륜의 지평 안에서, 특별히 삼위일체적인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바라본다. 결론적으로 말해 교부들은 성령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 글은 몇몇 교부들의 교회론적인 사고들 중에서 성령에 관련된 사고들만을 다룬다.
1) 희랍교부들의 교회론
가) 리옹의 이레네오
리옹의 이레네오(Irenaeus, +202년경)는 자신의 교회론을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의 일치된 영역 안에서 전개한다. 그가 말하는 교회는 “매일 매일 체험되는 실재이고, … 로고스의 계시 안에서 예수의 구원업적과 하느님에게 돌아가는 세상의 회귀 안에서 앞서 주어진 현실이며, … 프노이마(Pneuma), 곧 영과 성부와 성자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 안에서 정립된 공동체”2)이고, “하느님 자체이신 성자께서 손수 모으신 하느님의 모임”3)이다. 이러한 성령께서는 오로지 교회 안에서 활동하신다.(하지만 성령께서는 교회 밖에서도 활동하시는 분이시다.)
스스로 교회로부터 멀어진 자는 영의 공동체와 아무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교회가 있는 곳에 하느님의 영이 있고, 하느님의 영이 있는 곳에 교회와 모든 은총이 있기 때문이다. 영은 진리이다.(1요한 5,6 참조) 성령과 관계없는 자는 어머니의 가슴에서 영양분을 받지 못하는 젖먹이와 같으며, 그리스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샘물(묵시 22,1; 요한 7,37-38 참조)도 얻을 수 없다.”4) 그러므로 성령은 마치 어머니이신 교회처럼 양분의 원천이고 제공자이다.
나) 로마의 히뽈리토
서방에서 활동한 마지막 희랍교회 작가인 로마의 히뽈리토(Hippolytus, +235)는 교회를 구원사(救援史)의 범위 내에서 고찰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일치를 이루시고 강화하시는 성령의 힘 안에서 그리고 당신의 고통 안에서 그리스도 자신이 지으신 혼례복”5)이다. 이 영이 사도들에게 넘겨지고 계속해서 교회 안에 전달된다. 이렇게 영은 주교들과 사도들의 후계자들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교회의 교계제도는 영과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다) 테오도르의 몹수에스티아
테오도르의 몹수에스티아(Mopsuestia, +428)는 성령의 신성을 부정하는 성령 피조설파 (聖靈被造設派, pneumatomachi)6)를 반대하여, 성령을 제한 없이 삼위일체적인 영광송(Doxologie)으로 칭송할 것을 주장한다. : “영이 성부와 성자와 불려지고 고백된다는 것은 옳다. 왜냐하면 성령도 저 창조되지 않은 본성으로 있기 때문인데, 그 본성은 영원으로부터 존재하고 모든 사물의 원인이며, 모든 피조물은 이 본성에만 영예를 기울여야 한다.”7)
영은 변화시키는 힘이며 그리스도의 구원경륜에 있어서의 동행자이다. 성령 덕분에 교회는 사도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보존한다. 그러므로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의 활동 없이 교회적인 일치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 “바울로는 모든 신자들이 미래적인 희망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성령의 한 힘 안에서 한 몸이라는 것을 알려준다.”8)
몹수에스티아에 따르면 직무의 구원적 의미는 영의 협력 없이 적당하게 묘사될 수 없다. 이렇게 교회적인 직무는 성령론적인 기초를 갖는다.
라)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Cyrillus, 444)에 따르면 교회의 구성원은 성령에 연관됨으로써 서로 간에는 물론이고 하느님과도 하나이다. : “우리 모두가 하나이시고 같은 분이신 영, 곧 성령을 모셨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서로와 또 하느님과 연결되어있다. 자신을 위해 사는 우리가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우리 각자 안에 성부의 영을 살게 하시는데, 이 영은 또한 그분 자신의 영이시다. …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안에서 하나이고, …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과 유일하신 성령과 함께 하는 영성체를 통하여 하나이다.”9)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사람들의 영혼 속에 살기 위하여 교회에 선사하신 것이 성찬례이다. 따라서 만일 사람들이 성찬례를 통하여 성령에 연관된다면 그리스도와 그리고 상호간에 하나가 된다. 영과 성자를 통하여 중재되어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이 되며, 모든 것은 영으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성부에게로 인도된다. 이렇게 치릴로는 모상으로 만드는 신적인 본성에의 참여를 명백하게 성령의 내적 거주로 확정한다.
마) 대 바실리오
대 바실리오(Basilius, +379)는 삼위일체에 대한 전체적인 고백에서 특별한 지위의 성령론을 이끌어낸다. : “하나의 영혼은 … 가장 순수한 창조의 영역 안에서, 성자와 성부가 계시는 그곳에서 성령을 보게 된다. 이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같은 본성과 본질을 지니며 선함과 정의, 거룩함과 생명과 같은 모든 특성을 갖고 있으니, 성서가 ‘착한 영’, ‘올바른 영’, ‘거룩한 영’에 대해 누차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 한 분이 성부이시고 한 분이 성자이신 것처럼 그렇게 한 분 또한 성령이시다.”10)
성령(聖靈), 곧 ‘거룩한 성령’(마태 3,11 참조)이라는 이름은 영에 대한 원래적이고 고유한 명칭으로써 전적으로 특별히 영적인 것, 순수하게 비물질적인 것과 불가분적인 것을 표현한다. 성령께서는 스스로 생명의 시여자이고 성화의 원천이시며, 그분은 자신의 도달할 수 없는 본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선하시기 때문에 인간에게 파악될 수 있다. 성령께서는 오직 자신을 모시기에 합당한 사람들에게 전하여지신다. 그렇지만 그분이 전하여지시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정도가 아니라 개개인의 신앙에 상응하여 전하여지신다. 즉 성령께서는 신앙이 큰 사람에게는 아주 충만하게, 신앙이 적은 사람에게는 그만큼 부족하게 전해지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령이해 하에서 바실리오는 교회들이 “그 지체들이 오직 하나의 호흡으로부터 혼이 불어넣어진 유일한 몸으로서 성령 안에 뿌리를 박고 사랑 안에 일치되었던” 시기를 그리워하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영이 하늘에 있고, 땅을 채우고 있으며, 또 어디에나 있고, 그 무엇도 그를 제한할 수 없다. 그는 온전히 각 사람 안에 있으며 온전히 하느님과 함께 있다. 그는 종으로서 은사들을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독단적으로 은총들을 하사한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성령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나누어주시기” 때문이다.(1고린 12,11) 그는 중개자로 보내지지만 자신의 힘으로 활동한다. 그가 우리 영혼들 안에서 살고, 그가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결코 떠나지 않도록 기도하자.”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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