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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람, 희망을 찾다
너무 화가 나고 답답합니다


김종섭(토마)신부, 소람상담소 소장, 교구 가정담당

Q. 저는 30대 중반의 미혼 남성입니다. 부끄럽게도 아직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대학교를 마치고 몇 차례 취업준비를 하다가 보다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기 위해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시험에 몇 번 떨어지면서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계약직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누가 좋은 직장에서 많은 돈을 벌고 싶지 않겠습니까! 신부님, 왜 세상이 이렇습니까? 저는 한다고 해도 안 되는데 돈이 흘러넘치는 사람도 있고, 있는 사람은 점점 더 잘 살고…. 이런 상황에 성당을 다니면서 마음의 평화를 구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신자들은 서먹하고 불친절하고 신부님들은 너무나 바쁘셔서 그런지 저 같은 사람은 별로 관심도 없어 보이시고, 수녀님들도 바쁘시고 직원들은 뭐가 그리 지쳤는지 말 걸기가 무섭고… 신부님, 도전적인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 화가 나고 답답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예수님 말씀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답답해서 이렇게 편지를 드려봅니다. 죄송합니다.

 

A. 찬미예수님. 편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잘 하신 일입니다. 고마워요. 답답한 마음을 이렇게 편지로 함께 나누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요. 큰 용기를 내신 거예요. 형제님의 답답함은 사회 문제와의 연관이 더 커서 상담의 한계, 특히나 지면의 한계가 있다 보니 조심스러움이 커집니다.

우선 ‘부끄럽게도’, ‘죄송합니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저에게는 ‘정말 예의가 있으신 분이시고 늘 상대방을 배려하려는 마음이 있으시구나.’라고 느껴집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혹시 다른 사람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시는 것은 아닐까? 어떤 일이나 말을 해 놓고서 후회하는 성향은 아니신가?’라고도 느껴졌어요. 사실 ‘배려’와 ‘눈치 봄, 남을 의식하기’는 외향적으로 얼핏 보기에 구분이 안 갈 때가 있어요. 물론 출발점이 완전히 다르지요. 배려는 올바르고 건전한 ‘사랑’, 즉 나를 참으로 잘 사랑할 때 남들도 잘 사랑하게 되고 거기에 따른 자연스러운 사랑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반대로 타인을 의식하는 형태는 정확한 사랑의 포인트를 놓칠 때가 많거든요. 이 경우는 반드시 행동 혹은 말을 해놓고 ‘후회하기’가 동반된답니다. 그것은 ‘자기 존중’ 내지 ‘자신감’과 ‘자기애’가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일이에요. 어쩌면 형제님께서 스스로를 바라보심에 있어서 자신을 자꾸만 ‘후자’의 모습으로 몰아가고 계신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자기’가 ‘자신’에게 주는 영향이 제일 크다는 사실을 상기하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보다 객관화 시켜서 바라보는 노력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자기비하’를 하지 않기 위한 노력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객관화시키라고 하면 자꾸 ‘비교’의 방법을 써서 자신을 비하시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에서 외부요소에 대한 ‘비교’는 불필요합니다.

다음으로는 형제님의 마음속에 ‘분노’와 ‘화’가 많이 들어 차 있어 보입니다. 편지의 서두는 본인의 개인적인 상황에 대한 간략한 내용이었는데 그것이 갑자기 세상, 정치, 종교 등 다른 것으로 확장되면서 마치 할 말을 다 못하지만 그 대상에 대한 화가 치밀어 오르시는 것 같이 느껴졌어요. 맞습니다. 세상은 불합리한 부분이 많아요. 많다 뿐이겠습니까? 때로는 그렇게 살아야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것이 옳다는 합리화 과정도 거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곧 알게 되지요. 그렇게 산다고 해도 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보다 선량하고 올바르고 진실한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자에게 ‘화’와 ‘분노’가 생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신을 객관화 시켜 나가는 작업을 통해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찾아내고 나서는 어떤 형태의 행동을 취해야 할 텐데요.

첫 번째로 ‘화’, ‘분노’를 다른 곳으로 전이 시키지 않아야 합니다. 대다수의 우리는 세상의 여러 불합리한 것들(사실 나쁜 점이 많다지만 거기엔 좋은 점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에 화와 분노의 감정을 마구 쏟아 붓게 되지요. 감정의 ‘투사’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불에 기름을 부어 넣는 것과 같은 일이에요. 이 감정들을 따로 분리시켜 놓아야 합니다. 화가 나고 분노가 생기지만 이것들은 스쳐가는 감정이기에 따로 떼어 분리시켜 놓으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이 희석되고 사그라지게 됩니다.

두 번째로 그렇게 좀 안정적인 상태로 만들어 놓은 다음 이것들을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로 바꾸어봅시다. 소위 말하는 ‘오기’와 같은 에너지를 말합니다. 악의적인 것이 아니라 선의적인 방향성만 유지한다면 이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굉장한 힘을 주는 원천이 될 수 있다는 말이에요. 형제님은 충분히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에요. 조금만 사고의 패턴을 바꾸고 조금만 더 ‘나’ 자신을 진심으로 대하셨으면 합니다. 진심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결정을 하고 선택을 하셨다면 그런 ‘나’를 지지하고 응원하고 믿어주어야 합니다. 물론 그 과정이 힘들고 복잡하고 어렵고 귀찮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계속 노력해야 할 일입니다. 형제님의 인생은 형제님의 것이지요. 그리고 단 한 번밖에, 유일무이한 것입니다. 힘을 내세요. 기도로 함께 합니다.

 

* 아래 주소로 여러분의 고민을 보내주시면 채택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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