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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 봉쇄로 들어간 수녀들
- 대구가르멜수녀원의 여섯 창립자(1)


김정숙(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누군가를 집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을 가택연금이라 한다. 일종의 ‘형벌’이다. 그런데 평생 그렇게 살겠다는 사람이 있다. 더욱이 사람에게 말을 못하게 하는 것은 남이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기본적인 욕구이다. 그러한 침묵을 스스로 지키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봉쇄와 침묵’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위해 기꺼이 문밖으로 나와 지구 반 바퀴를 돌은 수녀들이 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그 봉쇄 안으로 초대했다.

 

교구의 오랜 기다림,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의 대구맨발가르멜’로

대구교구에는 관상수도회가 없었다. 박해시대는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루고 거의 수도공동체처럼 살았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가 오고 외교인들과 섞여 살면서 이런 생활은 점점 침해받게 되었다. 드망즈 주교는 관상기도회를 원하고 있었다. 최덕홍 주교는 프란치스코회를 초대하려고도 했다. 드디어 그 문은 서정길 주교 때 열렸다. 이 거대한 사업은 아주 작은 계기로 시작되었다. 1958년 루디 신부는 서정길 주교를 모시고 유럽방문길에 올랐다. 그때 그는 지인으로부터 마리아쩰 가르멜에 입회한 엘리아 수녀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는 대구의 주교도 교구에 가르멜을 초대하여 교회 안에 관상 부분을 강화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 소식은 엘리아 수녀에게 전해졌다. 당시 주교는 베를린의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10월초 루디 신부는 엘리아 수녀의 편지를 받고 마리아쩰을 방문했다. 그리고나서 그는 주교께 가르멜 수녀들이 한국에다 수녀원을 세울 의향이 있다고 전했다. 주교는 곧바로 마리아쩰에 대구가르멜 건립을 요청했다.

  

마리아쩰 가르멜은 설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때까지 수도원 건축공사도 끝내지 못한 상태였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가르멜 성소가 부쩍 늘었다. 마리아쩰의모원인 성요셉가르멜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분가를 고려했다. 그러나 마리아쩰의 땅을 팔겠다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 그들에게는 돈이 없었다. 그렇지만 원장 아눈시아따 수녀는 그들이 성모님께 수도원을 지어드리는 협력자로 불리어졌다고 깨달았다. 1953년 마리아쩰의 십자가 산에 있는 부지를 매입, 이태 후 공사를 시작했다. 모원에는 이미 방이 부족했다. 그해 겨울에는 수녀들이 난방도 되지 않은 복도에서 기거하기도 했다. 1956년 9월 14일 9명의 수녀들은 정식으로 성요셉가르멜을 떠나 마리아쩰 가르멜로 들어갔다. 그곳은 아직도 공사장 상태였다. 그리고 그들은 6년 후 같은 날, 대구에 똑같은 형편으로 수도원을 열었다.

아눈시아따 원장은 대구교구의 요청을 받고, 후원자들에게 그들이 마리아쩰과 극동의 대구가르멜 두 개의 수도원을 열도록 초대받았음을 강조했다. 그는 소책자를 발간하여 마리아쩰과 대구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후원자들에게 세세히 알리며 협조를 구했다. 봉쇄 수녀들이 지구의 반대편에 봉쇄수도원을 짓고 옮기는 데는 실로 많은 손이 닿아야 했다. 더욱이 그때 한국은 6.25 전쟁 후였다. 대구가르멜을 짓는 동안에는 4.19가 일어났고 이듬해 5.16이 터졌다. 쌀 한가마니에 1만 9천여 원 하던 것이 하루 사이에 2~3천 원이 오르고 있었다. 화폐개혁이 단행되고 모든 사회제도가 변경되었다. 그 사이 대구교구가 대교구로 승격되기도 했다.

수녀원 건립을 위한 교황청의 허락과 대구교구, 마리아쩰 수녀원 간의 행정상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마리아쩰의 수녀들은 한국의 새 수도원 설립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교구의 제의방 빨래와 제병 판매 등을 하면서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와 교회 은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대구가르멜을 위한 후원들이 이어졌다. 하루는 마리아쩰에 우편으로 봉헌금이 당도했다. 그 곳에는 “1960년 회람에 한국에 설립하려는 가르멜에 대한 소개가 있습니다. 그것은 훌륭한 선교 사업입니다. 어떤 할머니가 루르드 순례를 포기하고 이 수도원 설립을 도와준다는 글을 보고 감동했습니다. 저도 그 설립을 위해 일부를 보내드립니다.”라는 글이 동봉되어 있었다. 지인들의 관심을 보면서 원장수녀는 ‘성모 마리아는 베틀에 앉아 우리 구원의 솔기 없는 옷을 짜고 계신다.’라고 느꼈다.

그래도 수도원 건설에 따르는 ‘주문’은 끝이 없었다. 이미 마련한 대지에 도로가 생기게 되어 땅을 다시 구입해야 했다. 대구교구는 이번에는 성당이 설립되어 있지 않은 대명동 지역에 수도원 부지를 마련했다. 1만평이 넘는 땅이었다. 그럼에도 봉쇄구역의 보호를 위해 주변 땅을 더 사야 했다. 또한 앞산의 불교 사찰들보다 나으려면 성당내부를 돌로 지어야 한다는 등의 요구가 계속되었다. 또한 기술상의 문제 때문에 건축도 제 속도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새로운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해결되었다.

가령 린쯔교구의 가톨릭소년단 회장이 수녀원을 방문했다가 성당내부의 자재문제를 듣게 되었다. 그는 돌아가서 이 비용을 담당하겠다고 연락했다. 물론 교구에서도 가르멜수도원 부지 확장을 위해 안동, 대구 방촌동, 부산 동래의 땅을 처분하기도 했다. 봉헌을 통해서, 그것도 외국에서 들어오는 돈이라 제때 사용할 수 없어 은행에서 돈을 차용하기도 했다. 당시 교구에서는 칠곡 병원, 고령 한센인 정착촌, 파티마병원 등의 공사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다.

 

엘리아 수녀 홀로 공사장 도착

1960년 9월 19일 대명동에 서정길 주교의 첫 삽질로 시공식이 거행되었다. 대구시와 그 근방의 신자뿐 아니라 비신자들도 이 예식에 참여했다. 그리고 수도원이 지어지는 동안 그 앞을 오가는 사람들은 기대에 부풀었다. 이후 엘리아 수녀가 내장공사를 감독하러 창립자 중 첫 번째로 대구로 왔다. 본래 마리아쩰에서는 본국인 수녀와 한국인 수녀를 함께 파견하려고 계획했는데, 한국인이 서류상 문제가 되어 혼자 출발하게 되었다. 1961년 연말에 그는 마지막으로 감실 앞에 조배를 드리고, 원장 수녀의 축복을 받았다. 그는 회원들과 일일이 인사했다. 그리고 봉쇄문이 그의 뒤로 닫혔다.

 

 엘리아 수녀는 대구수녀원 건립에 불씨를 붙인 장본이었다. 그는 수녀원에 입회하기 전부터 교회에서 진보적인 활동을 했다. 그는 비인대학에서 수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그곳 교구청에서 가톨릭 학생들의 사회복지를 담당했다. 그러다가 43세 늦은 나이에 가르멜에 입회하여 종신허원을 끝낸 참이었다. 그의 정신은 차후에 있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과 일치했다. 엘리아 수녀는 1962년 1월 대구에 도착하여 샬르트성바오로회수녀원에서 가르멜수도원이 완공될 때까지 손님으로 묵게 되었다. 도착 이튿날은 주교가 대구가르멜수도원을 직접 안내했다. 그는 넓고 아름다운 지역을 보며 감격했다. 그때에는 이미 루디 신부가 성당 가대에서 성탄미사를 집전했고, 그 미사에서 세 명이 세례를 받기도 했다. 이어 주교는 그를 한솔 이효상에게 한국어를 배우도록 안내했다. 엘리아 수녀는 샬트르수녀원에서 이곳까지 걸어서 왕래하면서 공사를 감독하며 한국을 체험했다. 가르멜을 지원할 율리안나가 그를 곁에서 도왔다. 이때부터 마리아쩰 수녀들은 때론 밤이 이슥해질 때까지 수녀원 설립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미사성제에 필요한 제의나 전례복, 성구 등의 전례용품뿐만 아니라 가르멜수도원 안의 소임에 필요한 모든 물품들을 직접 만들었다. 그들이 보낸 성작수건은 50년이 넘는 지금도 남아 있다. 한국이 가난하다며 챙겨준 침대시트, 담요, 바늘, 실 등은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안지랑이 골짜기에 수녀원이 빛나게 되었다. 마치 시나이산 입구에 있는 성카타리나수도원 같은 모습이었다. 루디 신부는 마리아쩰의 봉쇄구역까지 살펴보면서 계획을 짰고, 대구에서 수녀원 설계도를 만들어 마리아쩰로 보내어 이를 검토케 했다. 대구가르멜수녀원 성당은 알빈 신부가 설계했다. 알빈 신부는 봉쇄수녀원 성당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수녀석을 따로 두고 별도의 문을 설치하여 일반 신자들도 함께 미사에 참례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수녀들과 일반 신자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도록 제대를 사선으로 배치했다. 또한 성당 출입구 상단의 큰 창에는 오스트리아에서 제작해 들여온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설치되었다. 이는 1962년 하우슬레(1903-1966)가 오스트리아 펠트키르히에서 제작한 〈피에타〉이다. 작가는 1947년 회화 부문에서 ‘위대한 오스트리아인 상’을 수상했고, 각종 비엔날레에서 주목받은 이였다. 성당 격자, 성화 등도 마리아쩰에서 보내왔다.

 

여섯 수녀, 봉쇄로 들어가다

1962년 9월 8일 마리아쩰에서 창립자 다섯 명의 수녀는 6년 전 성요셉가르멜에서 마리아쩰로 떠날 때와 똑같은 예식으로 강복을 받았다. 그들은 그렇게 ‘기도와 희생의 숨은 선교’에 나섰다. 그들은 9월 14일 대구에 도착하여 많은 이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들과 엘리아 수녀는 계산주교좌성당에서 이명우 부주교의 감사강복식에 참례하고 엘리아 수녀가 지난 9개월간 머문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을 예방했다. 그들은 그곳에서부터 가르멜수녀원을 향해 걸어갔다. 눈앞에 나타난 수녀원은 그들을 압도했다. 서정길 대주교의 주례로 성체강복과 축성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함께한 신부들과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수녀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수녀들, 교우들이 봉쇄구역을 둘러보았다. 이후 수녀들은 봉쇄 안으로 들어가고 대주교가 봉쇄의 자물쇠를 잠갔다. 가르멜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자기에게 속한 사람을 잊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하느님 앞에 서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세상과 떨어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모두에게 더 깊이 다가간다.

당시 대구 사람들은 이 낯선 건물, 낯선 생활 형태를 궁금해 했다. 수녀원장은 많이 묻는 질문 7가지와 그 아래 각각 간략한 설명을 적어 수녀원 문 앞에 붙여 놓았다. 「이 수녀들은 무엇을 합니까?」, 「어찌하여 그들은 봉쇄되어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합니까?」, 「어찌하여 수녀들은 가난한 사람이나 고아나 병자를 간호하지 아니합니까?」, 「어찌하여 이 가난한 환경 속에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집을 지었습니까?」 등.

 

대구가르멜을 위해 오스트리아와 한국에서 함께 기뻐하고 함께 걱정했다. 그 작은 손들이 모여 사랑을 빨아들이는 전자극이 되어 도심 한복판에 놓였다. 여섯 창립자를 비롯한 숨은 이들의 기도와 희생이 강렬한 자석으로 커갈 것이다.(도움: 대구가르멜수녀원, 상주가르멜수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