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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에 가다 - 복자 순교자 신석복(마르코)의 묘지
“저를 놓아 주신다 하여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다!”


박철수(보니파시오)|경산성당

태풍이 지난 뒤라서 그런지 하늘의 색깔이 가을 하늘처럼 높고 맑은 파아란 색을 띠고 온 산천은 그렇게 깨끗할 수가 없었다. 현풍 휴게소에 차를 세워두고 커피 한 잔의 향(香)을 맡으며 안내책자에 있는 주소 대로 내비게이션을 쳐 보았더니 주소가 있는 곳에 정보가 없어 관할 성당에다 전화를 걸어 순교자 묘지를 물었더니 다른 주소(여래리 238-2)를 알려 주어 남밀양 IC를 빠져나와 진영읍 여래리에 있는 진영성당 공원묘지를 찾아갔다. 진영 시내를 벗어나 옛날에 형성된 좁은 신작로 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성당 공원묘지 입구가 바로 코앞에 나타났다. 양쪽 기둥 대문 문설주에 성당 묘지가 새겨져 있고, 조금 높게 경사진 100여 미터 안쪽에 커다란 십자가가 세워져있으며 십자가 바로 앞에는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제대가 놓여져있다. 십자가까지 가는 길 양편에 측백나무가 순례객들을 환영하듯이 늦여름 바람에 손을 흔들어 주는 것이 매우 반갑게 느껴졌다. 오른쪽부터 십자가의 길 14처가 왼쪽, 오른쪽으로 기도하도록 측백나무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6처가 끝나는 중간 지점 왼쪽 마당으로 승용차 10여 대를 세울 수 있는 주차 공간과 그 위편으로 화장실이 있다.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는 성당 공원묘지가 나지막하게 봉분을 하고 망자의 이름이 세워져 있으며 옛날에 쓰던 세례명으로 비가 서 있다.

 제대 오른편에 신석복(마르코) 순교자의 묘가 있다. 일행과 함께 신앙 선조들께서 바치셨던 신앙 고백을 시작으로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치고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 한국의 모든 성인과 지난해에 탄생하신 순교 복자들에게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시도록 기도를 바치고 참배하였다.

무덤 앞에 쓰여진 비문에는 “치명자 신석복 말구의 묘”라고 쓰여져있다. 필자가 어릴 때 교리를 가르치던 수녀님께서 성경을 쓰신 4대 복음사가의 이름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마두도 말고(말구) 누가 요안이다.’라고 가르쳐 주셨다. 즉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의 사도들의 이름을 쉽게 외울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신 덕분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복음사가의 이름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참 지혜롭게 교리를 가르쳐 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치명자의 이름 아래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밀양 명례리에서 열심히 봉교 하던 중 1866년 병인 대교난 직후 1월 하순 체포. 대구감영에서 폭행과 심문에도 불복하고 신앙을 고수, 2월 27일 교살되어 위주 치명하였다.>

그리고 묘지 오른편 안내판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신석복(申錫福) 마르코 순교자(1826-1866). 신석복(마르코)은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明禮理)에서 살았다. 명례는 일찍부터 피난 교우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농사를 지으며 누룩과 소금행상(行商)도 하던 순교자는 병인박해가 일어나던 해(1866년)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붙잡혔다.

병인 치명사적에 따르면 <포졸들은 창원에서 장사하고 돌아오는 마르코를 며칠 동안 마을에서 숨어 기다리던 끝에 길에서 체포하였다. 그들은 밀양으로 가서 하루를 지냈다. 그동안 형제들이 돈을 주고 빼내려 했지만 순교자는 완강히 거부하였다. 마르코는 대구로 압송되어 수차례의 문초와 형벌로 온 몸이 찢기고 뼈가 부러졌다. 혹독한 심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하였지만 마르코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저를 놓아 주신다 하여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 할 것입니다.”하고 자신의 신앙을 의연히 고백하였다. 순교자는 열흘간 감옥에 있다가 1866년 2월 15일(음)에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당시 39세였다. 이후 가족들이 시신을 거두어 고향에 안장하려 하였으나 지방 유지들의 반대로 부득이 낙동강 건너 한림정(翰林亭) 뒷산 노루목(김해군 한림면 장방리)에 안장하였다. 그 후 진영본당에서는 순교자의 묘소가 야산에 방치되어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1975년 12월 1일 이곳 본당공원묘지로 이장하였다.>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시복 자료집에서는 이렇게 쓰여져있다. <신(석복) 이냐시오(마르코의 잘못)는 경상도 밀양 사람이다. 봉교(奉敎)한 지 10여 년 후에 병인년 2월 초1일에 대구 포교에게 잡혀 진영에서 추열할 때 매를 많이 맞아 상(傷)하고 갇혔더니. 외인 일가 영문을 정하여 제사(題辭)를 진영에 부치매, 영장이 다시 올려 묻되 ‘네가 천주학을 하느냐?’, ‘하나이다.’, ‘너를 놓아도 하겠느냐?’, ‘나가도 하겠나이다.’ 놓지 아니하고 10여 일만에 교하여 치명하니 나이 39세더라.>

또 다른 증언록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치명일기』 795에 있는 신 ‘이냐시오’는 이냐시오가 아니라 ‘말구’(즉, 마르코)이오니, 본명(즉, 세례명)을 바꾸소서.(오 야고버 증언)>

<본디 밀양 명례 살더니, 병인 정월 O일에 창원 마포에 장사 간 후로 대구 영포(營捕) 두 패 머리가 내려와 가산을 탈취하고, 수일을 수(소)문하여 장사 갔다가 온다는 말을 듣고 포졸 등(等)이 마주 가다가 김해 가산 지경에 이르러 행인 4~5인을 만나 성명을 차차 물으니 ‘내가 신가로다.’ 하거늘 즉시 수갑하여 밀양으로 와서 하룻밤 사이에 무수한 형벌을 하고 떠나가니 형제와 두민(頭民)과 포졸과 의논되어 전(錢) 80냥을 가지고 따라와 은근한 곳에 암치(暗置)하고 (신석복) 말구께 통기하거늘, 말구 그 형더러 말하되 ‘일 분전(分錢)이라도 주지말라.’ 하고 포졸을 재촉하여 가거늘, 그 형들은 돈을 가지고 회로(回路)하고, 말구는 포졸과 한가지로 가며 지경(地境) 지경이 능욕을 받고, 대구 진영으로 가서 세 번 형벌에 전신이 성한 곳이 없어 유혈에 옷이 다 젖고 뼈가 부서지되 종시 배교치 아니하니 다시 옥에 내려다가 수일 후에 교하여 치명하니 나이는 39세요, 때는 병인 2월 초2일(양력 3월 18일), 「오 야고버, 말구와 한가지로 잡혀 대구에서 동시 치명, (말구의) 자식 이냐시오, 지금 명례 산다.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중참(證參, 즉 증인) 외인 형 죽었다.」>

참으로 기가 막힌다.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알고 대구에서 밀양까지 와서 가산을 탈취하고, 사람을 잡아다가 가는 길에 마구 짓밟고 두들겨 패며 한 푼이라도 돈을 뜯어 내려고 온갖 횡포를 부리며, 가족들이 가져 온 돈을 가지고 빼내려는 사람들에게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겠다는 치명의 의지를 지키며 대구 감영까지 끌려갔으니 금전에 눈이 어두운 형리들의 형벌이야 오죽하였겠는가!

오! 공경받아 마땅할 순교 복자들이여! 복자들의 숭고하고 굳건한 신앙심을 저희도 가질 수 있도록 용기와 힘을 전구해 주소서. 현세의 온갖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은총을 전구해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