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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 봉쇄로 들어간 수녀들(2)
- 네 곳의 봉쇄수도원을 섬긴 예수의 데레사 수녀


김정숙(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마리아쩰에서 온 창립자 수녀들은 건강이 악화되어 연이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결국 맨 처음으로 대구에 파견된 엘리아 수녀, 대구가르멜 설립을 위해 마리아쩰에서 수련을 받았던 한국인 카리타스 수녀와 대구에 새 공동체를 열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히멜라우 수녀원에서 합류한 예수의 데레사 수녀 세 명만 남았다. 그중 예수의 데레사 수녀는 5년 후 모원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때쯤 마리아쩰에는 지원자가 넘쳐서 데레사 수녀의 모원에서는 그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곳 대구에 남았다. 그리고 그는 또 60을 훌쩍 넘긴 나이에 다시 상주의 창립자로 자리를 옮겼다. 가장 엄격하다는 히멜라우 가르멜을 찾아갔던 그는 마리아쩰수녀원을 거쳐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 대구에서 봉쇄수도자의 삶을 살다가 상주에 수도원을 세우기 위해 또 자리를 옮겼다. 이렇게 그는 네 곳의 봉쇄수도원을 살았다.

 

“지구본에서 한국을 손가락으로 눌렀어요.”

마리아쩰수녀원과 루디 신부는 대구가르멜 설립을 계획했다. 그들은 선교지에 자신의 고향을 이식시키는 ‘화분식 선교’가 아니고, 밀알을 새 땅에 깊이 심는 선교를 하고자 했다. 서정길 주교도 대구가르멜이 한국적이기를 기대했다. 그때 마리아쩰수도원도 설립 초기라 해외에 새로운 수도원을 세울 여력이 없었다. 그들은 한국인을 보내주면 이들을 수련시켜 대구로 파견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교회법적으로 가르멜 창립을 위해서는 종신서원 수녀가 6명 이상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대구교구에서는 지원자로 세 명을 보내려고 애썼다. 우선 카리타스 수녀가 이 기회를 선택했다. 이후에도 루디 신부는 세실리아와 마리아를 소개했고, 레지나 수녀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카리타스 수녀만이 수련과정을 해 내었다. 한편 마리아쩰에서도 파견예정자를 선발하여 준비하고 교육시켰다. 그런데 마지막에 1명이 부모의 반대로 오스트리아를 떠날 수 없게 되었다. 준비했던 인원에 결원이 생기면서 그들의 자리를 대신해서 초대된 이가 데레사 수녀였다.

1961년 가을 마리아쩰의 원장수녀는 오스트리아의 가르멜 수도공동체 전체에 도움을 호소했다. 종신서원을 마친 수녀가 단 5년만이라도 대구교구에서의 선교에 가담해 주기를 청했다. 이 요청이 히멜라우 가르멜에 도착했다. 본래 히멜라우의 원장은 데레사 수녀를 보낼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히멜라우 수녀원에서는 2~3명이 조를 짜서 매달 한 번씩 밤샘 성체조배를 했다. 그날 데레사 수녀는 원장수녀와 함께 성체조배 당번이었다. 둘이 감실 앞에 장궤하고 있었다. 데레사 수녀는 원장수녀가 가끔씩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처음에는 아무 느낌도 없었다. 원장수녀는 나중에는 “예수님이 얘기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묻는 듯이 돌아다보곤 했다. 다음날 원장수녀는 그에게 “어제 성체조배 할 때 무엇을 느끼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었다.

데레사 수녀는 한국에 가고 싶지 않았다. 지도를 보니 세계지도에 아시아가 있고, 그 끝에 꼬리처럼 붙은 한국이 보였다. 그는 손가락으로 한국을 눌렀다. 한국이 바다에 빠졌으면 하고 바랐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또 동생이 신학교에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출발은 가족에게도 힘든 일이 될 듯한 까닭이었다. 그때 히멜라우에서는 다른 수녀가 한국에 가고자 했으나 그의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쳤다. 데레사 수녀는 자신이 한국에 가야된다고 느꼈다. 데레사 수녀는 1월초 마리아쩰로 떠났다. 신부는 그에게 노자성체를 영해 주었다. 그들의 각오는 그만큼 결연했다. 히멜라우의 일지에 ‘데레사 수녀는 가르멜 전체를 위해 희생을 바쳤다. … 우리 공동체에서 그보다 한국에 더 적합한 사람은 없다.’라고 적혀 있다. 데레사 수녀는 한국에 파견될 때까지 8개월간 마리아쩰에서 히멜라우와는 다른 공동체 생활에 적응해야 했다. 엄격한 수도원에서 평화로웠던 데레사 수녀는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마리아쩰의 생활이 불편했다. 히멜라우로 돌아가고 싶을 때면, 그는 때때로 대구에서 가르멜 수녀원의 설립사업이 성사되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이러한 망설임은 그가 한국에서 가장 오래, 가장 넓게 가르멜의 어머니 노릇을 하도록 하기 위한 훈련이었다.

데레사 수녀는 1930년 다복한 가정에서 삼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부모는 사제생활을 높이 평가했고, 어머니는 매달 식비에서 일정액을 절약하여 가난한 신학생들을 도왔다. 이런 부모 밑에서 그의 신앙은 일찍 성숙했다. 그는 네살 때 첫영성체를 했다. 이 꼬마는 교회에서 영성체를 할 수가 없자 어머니를 조르기 시작했다. 결국 어머니는 신부와 의논했는데, 사제는 그에게 어린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교리를 가르치라고 했다. 그리고 열 달 후, 네 살이 되자 본당신부가 꼬마를 불러 찰고를 했다. 그는 알아들었던 대로 대답했고 결국 첫영성체를 할 수 있었다. 데레사 수녀는 대학 때부터 수도생활에 뜻을 두었다. 그는 역사를 전공하기 시작했으나 이내 신학대학으로 옮겨 신학을 공부했다.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2년간 종교교사로 일한 다음, 1955년 히멜라우에 입회했다. 그는 이때 무척 기뻤다. 기도로 온 세상을 도울 수 있다고 느꼈다. 그는 예수의 데레사라는 수도명을 받았고, 1960년 종신허원을 했다. 그가 어머니께 가르멜 입회 결심을 알려드렸을 때 어머니는 충격을 받았고, 그 충격 때문에 이튿날 세상을 떠난 터였다. 데레사 수녀는 1962년 다른 창립자들과 대구에 도착했다. 마리아쩰에서 파견된 수녀들과 데레사 수녀는 편지로 대구가르멜을 히멜라우와 마리아쩰에 실어 날랐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두 공동체는 이 편지를 함께 읽으며 대구의 모든 일에 동행했다. 마리아쩰, 히멜라우, 대구가 함께 새로운 길을 열었다.

 

어려움을 딛고 상주에 또 다른 열매를

새로운 봉쇄수녀원은 아무것도 없이 시작되었다. 그들에게는 가장 필요한 것조차 없었다. 대구가르멜이 초창기에 겪은 어려움은 난방문제에서도 볼 수 있다. 1963년초 마리아쩰에서는 대구로부터 한동안 소식이 없어 걱정했다. 그때 대구에는 한파가 몰아치고 있었다. 대구가르멜에서는 방에 있는 물뿐만 아니라 소금기가 있는 성수까지도 다 얼었다. 수녀원의 소형 전기발전기를 가동시켰으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에서 부쳐온 중고 기계라서 그 부품을 조달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집 전체의 수도관도 얼어붙어 그들은 매일 우물로 물을 길으러 가야 했다. 이러한 상황이어서 수녀들은 편지를 쓰기 위해 종이를 타자기에 집어넣고는 계속 이어 나갈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샬트르성바오로회 수녀원에서는 가르멜 수녀들이 얼어 죽지 않았는지 안부 차 들리기도 했다.

대구가르멜 수녀원을 지을 당시 루디 신부는 양국을 오가면서 건축을 지휘했다. 그는 현 수도원 건물에 온돌을 놓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본래 한국적 생활양식에 적응하기로 준비하고 있었던 창립 수녀들도 한국식 온돌과 주방을 설치하기로 했다, 그러나 연탄과 땔감으로 난방을 하던 시절이라 불편을 많이 겪어 대구에 살던 외국인들은 서양식 부엌을 적극 권했다. 연탄불로는 식사준비 시간을 맞출 수가 없어서 공동생활에는 어려움이 많다고도 했다. 그래서 내부공사를 위해 먼저 와 있던 엘리아 수녀는 온돌을 놓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대신 본국에 중고 보일러와 주방용 레인지를 부탁했다. 그러나 그 ‘만능’을 기대했던 보일러는 자주 문제를 일으켰다. 수녀원 수방(修房)은 한겨울에는 오히려 창문을 열어 놓아야 더 따뜻한 형편이 되었다.

초창기 수녀원에는 일이 터지지 않는 날이 없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공동체의 일치는 공고했고 이웃에서는 사랑을 보내왔다. 지원자와 수련자들이 끊이지 않고 배출되었다. 드디어 창립 30여 년이 되자 상주로 분가를 계획하게 되었다. 상주가르멜의 출발을 위해서는 설립 초기의 과중한 부담을 이겨낼 수 있는 젊은 수녀들이 뽑혔다. 설립자 중에는 한국인 카리타스 수녀가 상주로 떠나기로 했다. 데레사 수녀도 결국 상주가르멜 수녀원의 출발에 합류했다. 그는 이렇게 네 번째의 새로운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 데레사 수녀는 말가리다 수녀와 함께 상주가르멜 건축현장에 파견되었다. 공사는 예상보다 지연되어 2~3년 더 걸렸다. 데레사 수녀는 컨테이너 박스에서 생활하면서 공사감독을 했다. 상주 골짜기에 외국인이 현장에 있으면 공사장 분위기가 좋아지리라는 수녀원의 기대도 있었다. 그는 처음 상주 수녀원 자리를 보았을 때 좁다고 생각했다. 평지에 살던 그로서는 산자락에 매달린 이 공간이 좁아 보이기도 했겠지만 그의 내심으로는 봉쇄수도원 안에 채소밭을 일굴 공간이 없을까봐 염려했다. 그는 ‘상주로 분가하는 수녀들이 이사를 오면 먹을 게 없다.’며 틈만 나면 산기슭에서 돌을 주워내어 날랐다. 그는 골반이 부실하여 골반 골절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는데 혼자 밭을 일구다가 또 허리를 더 다쳤다. 그의 허리는 90도로 굽어졌다.

 

설립자가 지키는 가르멜인의 삶

마리아쩰은 한국문화를 존중했다. 서정길 주교는 공사착공 전 오스트리아 마리아쩰을 방문했다. 수녀원에서는 이때를 기해 한국인인 까리타스 수녀의 착복식을 거행했다. 그들은 카리타스 지원자를 한국의 전통적 신부 복장으로 치장했다. 또한 수녀원에서는 오스트리아에 있던 한국유학생들을 이 예식에 초대했다. 한국인들은 착복식 미사 후, 격자를 통해 카리타스 수녀에게 한국식으로 절을 했다. 그들은 ‘복자찬가’를 함께 불렀다. 이로부터 대구가르멜에서는 한동안 착복식 때 한복을 입었다. 그뿐 아니라 가르멜수녀원을 대구에 세우기 위해 파견될 수녀들은 오스트리아 수녀원에서 이미 카리타스와 마리아 수녀에게 한국어를 배웠다. 그들은 독일어 때문에 미래의 젊은 한국 수녀들이 분심 받지 않도록 대구수녀원에서는 한국어만 사용하자고 약속했다. 마리아쩰에서도 수시로 환등기 사진이나 유학생을 통해 한국을 배웠다. 즉 각자의 소양을 살리는 봉헌이었다.

대구가르멜 수녀원의 세 창립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들의 역할을 해냈다. 엘리아 수녀가 계획하고 데레사 수녀가 그 운영을 감싸고 메꾸어 나갔으며, 카리타스 수녀는 순명의 삶을 보였다. 공동체에서는 데레사 수녀가 어머니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특히 데레사 수녀가 자원하여 상주가르멜로 이동한 일은 외국선교사가 한국을 위해 수행한 조용한 봉헌이었다. 그 결과로 대구와 상주 두 공동체는 균형있는 삶을 구가할 수 있었다. 엘리아 수녀는 대구에 있는 60~70대 수녀들과 보다 일치를 다지는 기간을 가졌다. 또 데레사 수녀는 젊은 수녀들만 있게 될 상주 새 수녀원의 기틀을 잡아주었다. 그러나 서로 나누어진 창립수녀 자신들에게는 남다른 분리였다. 생활은 언어보다 더 강한 서로 간의 부딪침이다. 엘리아 수녀는 병석에 눕게 되면서 데레사 수녀의 이름을 자주 불렀다. 병실에서 함께 동반해 주지 못하는 데레사 수녀도 마음이 아팠다. 그들은 그렇게 가르멜의 규칙을 지켰다. 엘리아 수녀는 2003년 선종했다. 카리타스 수녀는 지난 2015년 5월 세상을 떠났다. 데레사 수녀는 젊은 한국인 수녀들이 ‘이제는 쉬라’며 우대하려해도 ‘나에게도 소임을 달라’고 주문하며 굽은 허리로 가르멜의 삶을 마지막 순간까지 새겨나가고 있다.

대구가르멜은 그 어려운 난방시스템 등을 조금씩 고치며 살다가 1996년 상주가르멜이 분가해 나가고 나서 온돌을 놓았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수녀원은 미래의 젊은 지원자들을 위해 그 열악한 환경을 고쳐야 한다고 판단했다. ‘대구가르멜 선교의 최적격자’로 지명되었던 데레사 수녀는 ‘급변하는 사회에서 후배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는 질문에 무언의 답을 아직도 쓰고 있다. 그런 수많은 데레사 수녀가 모인 가르멜 담 안, 그들의 사랑이 담 밖으로 넘쳐 나온다.(도움: 예수의 데레사 수녀, 상주가르멜수녀원, 대구가르멜수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