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초행이었다. 성지순례를 하기 위해 제주행 탑승권을 예매한 날부터 설레기 시작했다. 남들은 비행기가 이륙할 때 불안하다는 말을 하는데, 나는 땅을 박차고 비상하는 그 순간이 좋았고, 유럽 성지순례를 다녀 온 수년 만에 그 기분을 다시 만끽할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도시와 산야를 지나자 망망대해가 펼쳐졌다. 안개 속에 드러나는 대해를 창문으로 내다보면서 명문대가에서 태어나 귀재 황사영(알렉시오)과 혼인하여 부귀영화가 보장됐는데도 하느님 때문에 패가망신하고, 귀부인에서 노비로 전략하여 관노로 팔려가야 했던 28세 정난주(마리아)를 떠올렸다. 추자도에 아기를 내려놓고 무너지는 가슴을 안고 망망대해를 가는 심정이 오죽했을까? 칼을 받지 않았다 뿐이지, 성모님처럼 가시에 심장이 꿰뚫리는 영혼의 순교를 당하며 뱃길을 갔으리라. 세상이 바뀌었어도 만 분의 일이라도 그분의 마음에 동참하려고 대해가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눈길을 놓지 않았었다.

의정부교구 장흥면에 있는 황사영의 묘를 참배할 때 비가 내렸었는데, 이튿날 대정성지의 정난주의 묘를 참배할 때도 비가 내렸다. 황사영의 묘를 찾을 때 비닐하우스가 묘를 가리고 있어 찾기 어려웠는데, 정난주의 묘 뒤쪽에도 비닐하우스가 있어 미관상 좋지 못한 안타까움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제주도 유배길이 어디서 멈춰 어느 곳에서 배에 올랐는지 알 수 없으나 나름대로 완도에서 출발했을 거라는 가정하에 완도에서 추자도행 8시 여객선을 탔다. 이처럼 배를 타게 된 것도 처음이며 추자도를 찾아 가는 것 또한 난생 처음이었다. 뭐든 처음인 것은 기분이 들뜨고 신기하기 마련이지만 다산 정약용(세례자요한)이 초당 유배 시에 규율로 삼았던 마음을 깨끗이, 몸을 단정히, 말을 삼가고, 행동을 바르게 하는 일에 마음을 썼다. 몇 노트인지는 모르지만 차량의 속도로 어림잡아 65㎞~75㎞ 정도는 될 듯한데 느리게만 느껴졌다. 이 속도도 느리게 느껴지는데 1801년 음력 11월 중순에 돛대에 의지하여 제주도까지 가려면 몇날 며칠이 걸렸을까?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풍랑과 매서운 바닷바람에 몸을 맡기며 정난주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황경한의 묘를 참배한 후 모정의 쉼터에서 대해를 내려다보며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춘천교구 죽림동 주교좌성당에서부터 마산교구, 광주대교구에 이르기까지 육지에서 섬으로 다시 뭍으로 순례 여정을 이어갔다. 이윤일 요한 성인의 유해가 모셔진 대구 관덕정 순교성지, 한국 최초의 수덕자로 칠극의 가르침에 따라 수계생활을 하신 우곡성지의 홍유한(1726-1785) 선생, 여름의 끝자락에는 배론성지에서 최양업(토마스) 신부님을, 만추의 계절에는 한국천주교회의 발상지인 천진암 성지에서 교회창립 선조들을 만났으며, 한겨울에는 좁은 차안에서 토끼잠을 잔 후 순교자 정찬문(안토니오)의 묘와 순교자 윤봉문(요셉, 1852-1888)의 묘를 참배했다. 신앙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 131년이라는 시공을 넘나들며 머물렀다. 131년이라 함은 홍유한 선생이 1757년경에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충남 예산으로 내려가 칠극에 따라 수계생활을 시작한 해이고 1888년은 124위 중에서 백스물 네 번째인 윤봉문 복자가 순교한 해이기 때문이다.

나는 부끄럽게도 단체에 섞여 성지를 순례할 때마다 어느 고적지에 온 것처럼 구경만 하다가 왔다. 순교자들과 증거자들은 특별한 사람들이며 그분들과 나와는 늘 별개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담 너머에서 멍히 바라보던 구경꾼이 아니라 이제는 담 안으로 들어온 순례자로 불리고 싶다.
순교자들은 우리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것처럼 고문과 형벌을 능히 견디고도 남을 만큼 건장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불구자와 장애인도 있었으며 굶주림으로 병약하거나 허약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엄격한 수계생활과 외유내강으로 허한 육신을 능가하는 강인한 정신력이 있었으며,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천주님을 위해 순교하려는 원의가 무엇보다도 컸던 것이다. 똑같은 인간이기에 죽음의 두려움과 고통의 깊이에 눌려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많았겠으나 그분들은 주님의 은총으로 모진 고문과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르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이처럼 순교는 하루 아침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방한하시어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솔뫼 개막미사 후 청년들과 함께하는 문화프로그램에 참석하셨는데, 외국인 청년이 올라와 자기 나라 출신 중에는 아직 성인이 한 명도 없는데, 한국 신자들이 부럽다며 자기 나라에도 성인을 추대해 줄 것을 교황님께 간청하는 것을 보고 콧등이 찡했었다. 외국인들이 감명 받을 만큼 우리나라에는 순교자와 증거자들이 참 많으시다. 이미 성인품에 오른 103위, 2014년 시복되어 시성을 기다리는 124위와 최양업(토마스) 사제와 이벽(세례자요한)과 동료 132위, 홍용호(프란치스코 보르지나) 주교와 동료 80위, 신상원(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와 동료 37위의 시복을 위해서도 교회가 기도하고 있다.
머지않아 이분들은 성인의 반열에, 복자의 반열에 오를 것이고, 교회는 또다시 환호할 것이다. 이처럼 한국 천주교는 세계가 부러워하고 주목하는 복된 나라지만 정작 복된 나라 안에 사는 주인공인 우리들이 성인들과 복자들의 위대한 신앙과 삶을 본받으려 하지 않고 무관심하게 살아간다면 성인들과 복자들이 아무리 많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나라는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들보다 무명 순교자들이 더 많다고 한다. 그래서 인천교구의 일만 위 순교자 현양동산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순교자들보다 배교자들이 훨씬 많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온갖 고문과 칼과 무력에 의한 피의 순교가 없을 뿐이지, 이 시대에도 일상의 순교는 유효하다.
지금은 물질 만능시대며 타협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식상할 정도로 매주 금요일마다 교회 달력에 명시되어 있는 금육, 무릎을 꿇지 않고 편하게 바치는 기도로 인해 사라져가는 장궤틀, 서구의 물결과 개인주의로 머리에서 하나 둘 벗겨지는 미사보 등등. 시대와 풍조가 바뀐다 해도 교회가 명하는 것은 지켜야 하고, 한국교회의 아름답고 고유한 전통은 이어져야 한다. 명하는 것과 전통을 무시하다 보면 나 자신과의 타협, 신자들 간이 저울질에서 오는 타협, 세상과 타협해야 할 일은 더더욱 많아질 것이다.

나는 국내 성지순례를 마치 마라톤 완주하듯이 한 번으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진행형인 ‘1차 전국 성지순례를 마치며’ 라고 제목을 정했다. 우리가 사는 곳마다 본당이 가까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성체조배와 매일미사에 참례를 할 수 있으며, 내가 원하기만 하면 고해성사를 언제든 받을 수 있으니 우리 신자들은 참으로 풍요로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편한 세상에 길들여져 살다보니 온실속 화초와 같고 몸은 건강하나 정신이 따라주지 못해 환란과 역경이 닥쳤을 때 어려움을 이겨낼 힘이 부족한 것 또한 사실이다.
주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일생을 바친 성인들을 공경하며 그 표양을 본받게 하셨으니 ‘성인들의 통공’ 안에서 살아간다면 그만큼 현세를 살아가는데 힘이 생기고 천국여정의 발걸음도 한결 가볍게 느껴질 것이다. 우리나라의 순교자, 증거자들은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는 바로 이 땅에서, 우리보다 앞서 살다 가신 신앙선조들이시니 우리들의 처지를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고 도와주려 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성인들을 자주 찾고, 자주 불러야 한다.
백과사전에 보면 연어는 봄에 부화된 지 몇 주일 후에 바다로 돌아간다. 그리고 바다로 내려간 지 3~4년 만에 성숙하여 모천(母川)으로 회귀한다고 한다. 자기가 태어난 강으로 가고자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천회귀성(母川回歸性) 연어는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세속의 바다에 살면서도 마음과 정신은 모천회귀성(母川回歸性)의 연어처럼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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