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구의 모든 가정에 주님께서 강복하시고 늘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를 통하여 주님의 지체가 된 우리 모두는 주님을 가장으로 모신 큰 집안의 식구들입니다. 그리고 이 큰 집안인 교회를 구성하는 기초는 바로 교우 여러분의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인 복음화는 바로 가정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현대 사회의 병폐들 중 많은 부분이 가정의 문제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가정의 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열의와 보다 치열한 노력이 시급합니다. 지난 10월 4일부터 25일까지 열렸던 세계 주교대의원회에서 가정의 소명과 사명을 의제로 삼았던 것도 이러한 시대적 요청을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보편 교회의 관심과 우리 사회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올해에는 가정의 성화를 위해 교구의 힘을 모았으면 합니다.
오늘날 가정은 매우 복잡한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과도한 경쟁과 고용시장의 불안으로 인해 젊은이들이 혼인을 주저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혼인 연령은 높아지고 출산율은 감소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가족 중심의 가치관이 붕괴하는 가운데 가족 간의 소통 장애가 심해지고, 일인가구, 조손가정, 이혼하는 가정 등의 깨어진 가정과 도움이 필요한 다문화 가정도 계속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우리 사회에 팽배한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는 이와 같은 가정의 위기를 더욱 부추기고 있습니다. 지역사회와 국가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보다 근본적으로 가정이 무엇이며 어떠한 가치와 사명을 지니는지 신앙 안에서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은 인간의 도성(都城)에 빛을 비추는데 그 첫째 자리는 가정”(『신앙의 빛』, 52항)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따라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심으로써(창세 1,27 참조) 사람이 가정을 이루고 살도록 정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습을 취하실 때에도 가정의 일원이 되시어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원하셨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며 자라심으로써 성가정의 모범을 남기셨고(루카 2,51 참조), 첫 기적을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일으키셨으며(요한 2,1~12 참조), 신자들 간의 혼인을 성사로 제정하셨습니다(마르 10,1~12 참조). 바오로 사도께서 가르치신 대로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시어 거룩하게 하신 부부의 사랑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드러내는 큰 신비(에페 5,21~33 참조)이므로, 가정은 사람에게 지워진 굴레가 아니라 그를 고양하고 완성하는 은총의 보금자리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며, 이 믿음의 보화는 등경 위에 놓인 등불처럼(마태 5,15 참조) 세상을 비춤으로써 기쁨과 희망의 원천이 됩니다.
주 예수님과 성모님, 요셉 성인께서 보여주신 이 기쁨과 희망이 지금 우리 가정들과 세상에 간절하게 필요합니다. 올 한 해 동안 교구의 여러 기관과 단체들은 서로 협력하여 성가정의 모범을 본받기 위해 노력하는 가정들을 격려하고, 젊은이들이 혼인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치며,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자비의 희년’을 맞아 상처받고 어려움을 겪는 가정들이 위로와 치유를 받을 수 있도록 애써야 하겠습니다. 가정 복음화를 위한 노력의 현장인 본당들은 교구와 대리구의 지원을 기꺼이 활용하여 소속된 가정들의 성화와 곤경에 처한 가정들의 치유를 위한 사목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하기 바랍니다.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활동들을 마련하고, 가정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협력하도록 이끌며, 지역의 특성을 고려하여 주민들과 함께 인근의 가정들을 위한 공동선을 추구할 방법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사제들은 가정에 맡겨진 거룩한 사명에 대해 교우들을 가르치고 고해와 상담에 기꺼이 응하며, 거룩한 민감함과 자상함으로 상처 입은 가정들을 보살피고 교우들과 협력하여 치유의 방도를 성실하게 찾기 바랍니다.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평신도들은 자신이 바로 가정 복음화의 주역임을 깨닫고 성가정을 이루는 일에 끈기 있게 헌신하여야 하겠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를 복음의 정신에 따라 기르는 데 힘쓰고 자녀들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며 소통하는 가운데 서로가 서로에게 하느님의 선물임을 발견하기 바랍니다. 청소년들과 특히 혼인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은 사랑을 위해 자신을 모두 바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지를 생각하고 머지않아 하느님께서 맡기실 가족들을 위해 몸과 마음을 온전하고 깨끗하게 보존하여야 하겠습니다. 성가정은 주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살아가는 가정이므로, 어느 집안이든 다만 한 사람이라도 교우가 있다면 주님께서 그 집에 들어오셔서 거룩하게 해 주시기를 바라야 합니다. 성가정을 이루는 이 사명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가족들을 위해, 또 가족과 함께 꾸준히 기도하며, 도움이 필요한 다른 가정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며 가정생활 안에 그분을 모셔 들일 때 그 가정은 구원의 공동체가 되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가장 가까운 교회”(2015년 7월 6일 에콰도르 사목방문 중)가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가정에 내려주신 큰 은총을 묵상하고 모든 가정 안에서 그 은총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서로 돕고 격려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부족하고 결점이 많은 우리를 택하시어 은총의 도구로 삼으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시작하신 큰일을 완성하시어, 교구의 모든 가정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마 12,1)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성 요셉, 저희 가정과 저희 교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 이윤일 요한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 가정과 저희 교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2015년 11월 29일 대림 첫 주일에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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