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이 시작되고 연말이 되면 갈등의 시기도 시작됩니다. 갈등이란 두 가지 이상의 상반되는 요구나 욕구, 기회 또는 목표에 직면하였을 때 선택을 하지 못하고 주저하거나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한자로 갈(葛)은 ‘칡나무’, 등(藤)은 ‘등나무’를 뜻합니다. 이 두 나무는 항상 다른 나무나 기둥 같은 물질을 휘감아 오르면서 자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아 오르는 방향은 서로 다릅니다. 칡나무(葛)는 왼쪽으로 감는 좌향(左向)적인 반면, 등나무(藤)는 오른쪽으로 감아 오르는 우향(右向)적입니다. 왼쪽으로 감고자 하는 칡나무와 오른쪽으로 감고자 하는 등나무가 만나면 서로 왼쪽이나 오른쪽을 고집하면서 마찰이 생기고 불안정함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葛藤)이란 단어가 생기게 된 것이라 합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이것이 좋을까 저것이 더 좋을까? 우리는 삶의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서 머뭇거리거나 주저하거나 방황하게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구세사는 갈등과 선택의 역사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처음부터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금단의 열매를 놓고서 따 먹을까 말까 하면서 오랜 시간 동안 많은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점령한 이스라엘에게 지도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택 결정권을 줍니다. 가나안 지방의 우상들을 섬길 것인지 하느님을 섬길 것인지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권이지만 이스라엘에게는 갈등의 순간이었습니다. 또한 영웅 삼손도 세속적 쾌락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많은 시간 동안 방황하였습니다. 예언자들 역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고통과 자신의 안일함 사이에서 번민하였습니다.
구세사의 결정적인 순간 두 분의 갈등이 돋보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갈등입니다. 나자렛 산골 처녀인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수태를 예고합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자면 온갖 욕설과 비난은 물론이며 수많은 고통이 따름은 너무나 명백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계신다.”는 천사의 축복인사도 마리아에게는 오히려 엄청난 중압감이었을 겁니다. 자신이 선택할 편안한 삶인가, 하느님이 제시하신 고통의 길인가? 나자렛의 마리아 역시 많은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양아버지 요셉도 비슷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요셉 자신과는 상관없는 아이를 수태한 마리아와의 약혼을 파약함으로써 명예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마리아와 혼인함으로써 불명예와 지탄을 받을 것인가?
선택의 순간마다 어떠한 망설임이나 갈등을 겪음 없이 결단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우리의 갈등을 잘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잡은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로마 7,18-23)
심각한 갈등을 겪을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됩니까? 결단을 내리기 전에 우리는 손익계산서를 수도 없이 많이 따져봅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것과 세속을 따르는 것 중에서 내게 이득을 더 많이 줄 것이 무엇인지 계산해 봅니다. 여호수아의 제안을 받은 이스라엘 역시 이해득실을 따져본 결과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현실적인 이득이 많다고 판단하고서 다음과 같이 응답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두고서 누구를 따르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적 이득 때문에 하느님을 선택한 이스라엘은 또 다른 손익계산서 때문에 하느님을 버리고 이방의 신을 따르게 됩니다. 현실적 이득은 절대적인 중심을 두지 않고 항상 더 크다고 여겨지는 이득을 쫓아 마음이 변하게 더 큰 갈등을 겪게 만듭니다. 인간적 선택은 언제나 더 큰 이득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작은 지혜에 집착하게 됩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을 겪던 마리아 아가씨 역시 이해득실을 따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현실적인 이해득실을 가리는 자신의 판단을 중요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마지막 결론은 자신의 작은 지혜에 바탕을 두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생각에서 나오는 판단을 중단하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겼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작은 지혜에 따른 결론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무한하신 지혜에 모든 것을 맡기는 큰 지혜였습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이로써 구원사업이 결정적으로 이루어지는 시발점이 되었고 인류의 갈등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시는 구세주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시게 되었습니다.
● “열린 마음으로 세상보기”는 이번 호로 끝맺습니다. 그동안 유익한 글을 써 주신 신부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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