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에서 단동까지 이틀이면 족한 거리를 열흘이나 넘게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구겨 앉아서 아무 대우도 받지 못하고 실려왔다. 그나마 여기까지 온 것만도 다행이라고 감사할 수밖에. 기차에서 내려 피난민 수용소로 발길을 옮겼다. 구경 좋아하는 중국인들이 길 양옆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멍하니 감정 없는 사람들처럼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조선인이야, 일본 사람들이 아니야.”라고 수군거리면서 우리를 바라보는 눈들이 조금은 애처로운 눈치였다.
도착한 곳은 단동 어느 학교를 수용소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여러 학교로 나누어져 수용되었고, 저마다 교실로 뛰어 들어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은 이왕이면 같은 교실을 사용하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보니 빈 교실이 하나 있었다. 그 교실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마자 먼저 들어갔던 사람들이 하나씩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나중에 보니 우리만 남았다. 다른 사람들이 나가고 난 다음 교실을 둘러보니 저쪽 구석에 송장이 한 구, 가마니에 덮여져 있지 않은가!
우리만 남았는데 우리도 할 수 없이 나가지 않을 수 없어 나갔더니, 다른 교실은 모두 꽉 차서 다른 학교를 찾아가야 한다고 했다. 무거운 짐을 들고 끌고 피곤했지만 처져 있을 시간이 없다. 100m쯤 걸어갔더니, 그곳에 작은 유치원이 하나 있었는데 교실 한 칸이 우리에게 배당되었다. 거기에 들어온 사람들은 훨씬 깨끗한 곳에 왔다고 좋아들 했다. 어른들은 모여서 이제 유치원에서 하루 자야겠는데 교대로 경비를 서야 한다고 회의를 하고 있었다. 10여 조를 만들어 문에서 교대로 지키기로 하고, 만일 중국 사람들이 쳐들어오면 크게 소리를 지르라고 주의사항까지 전달하였다.
사람들은 저녁도 못 먹었지만 지쳐 있어서 즉시 잠에 곯아떨어졌다. 얼마를 잤을까, 갑자기 한쪽에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 방에서 자던 사람들 전부가 일어나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소리만 질렀지, 그 이후 다른 어떤 사정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계속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한 사람이 “조용해라. 아무 일도 없다.”고 해서 우리들은 지르던 소리를 멈추고,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고 어처구니없는 일이라며 다시 누워 자기 시작했다.
왜 그런 일이 생겼는고 하니, 한 조가 경비를 설 때 춥고 배도 고프고 피곤해서 같이 이야기를 하다가 한 사람이 가마니를 덮고 자기 시작했다. 잠이 든 다음, 교체시간이 되자 자는 사람만 두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가버렸다. 새로 교체된 사람들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사람이 손에 든 막대기로 아무 생각 없이 가마니를 ‘툭툭’ 치니, 가마니를 덮고 자던 사람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가마니를 들치고 벌떡 일어나니, 가마니를 친 사람도 가마니를 덮고 자던 사람도 놀라서 둘이 같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은 뭔지도 모르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사람들은 그 당시 너무나 심각한 생과 사의 사이를 오락가락 했기 때문에 한번 활짝 웃어보지도 못했다. 지금 이 글을 쓰다가, 나도 그때 영문도 모른 채 소리를 질렀던 상황을 생각하고 혼자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아침에 모이라는 장소에서 인솔자는 더 어이없는 말을 했다. 소련 당국과 교섭을 해보았지만 중국기차는 조선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여기서부터 조선까지는 각자 알아서 압록강을 건너가라고 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럴 수가 있느냐, 어떻게 각자 그 큰 강을 건너가라는 말이냐?” 하고 불평해 보았지만, 이제부터는 각자 알아서 가라고 하니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서로 상의하다가 배도 없이 압록강을 건넌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그렇다고 이곳 지리를 잘 알아서 다르게 갈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니, 이곳에 사는 조선 사람들을 찾아 다른 어떤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어보기로 했다.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방법은 단동에서 동쪽으로 수십 리를 올라가면 압록강 지류가 여러 개 나오는데, 그 지류와 지류 사이에는 마른땅도 있고 집들도 있다고 했다. 지류들은 사람이 다닐 수 있을 만큼 얕은 물만 있고 달구지도 지나갈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조선 땅과 가까운 지류 한 곳은 물이 깊어 달구지가 못 지나가니 배로 건널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곳은 작은 배로 여러 번 왕래가 가능하다고 했다. 또 그 길로 피난민도 다녔다고 이야기 들었다.
우리는 그 말을 듣고 그 길로 가기로 결정하고 달구지를 두 채나 빌렸다. 짐을 싣고 사람들도 타고 단동에서 동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얼마를 올라가서 저녁이 되니 하는 수 없이 중국 사람 동네에서 묵게 되었다. 그 촌구석에 여관이 있을 리 없고 더더구나 외지 사람들이 머물만한 큰방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농기구를 공동으로 갖다 두는 헛간 같은 곳을 빌려달라고 애원해서 하루 저녁을 묵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 동네의 한 가족이 조선 사람들이었는데, 밥을 해 주겠다기에 부탁해서 오래간만에 상에 차려진 밥다운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동네 중국 사람들과 밥을 해 준 아줌마에게 감사를 드리고 달구지를 새로 사서 길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거의 하루가 걸려 올라가다 보니, 점점 조선과 가까워진 거리에서 그 깊다는 지류가 나타났다. 작은 배를 가진 사람에게 부탁해서 한 번에 대여섯 명씩 타고 몇 번만에 지류를 건넜다. 조선 땅에 와서도 우리가 머물 수 있는 수용소까지는 길이 멀었다. 하루 더 시골 남의 집에서 나누어 자고 난 후, 인민위원회에서 나왔다는 자위대의 안내를 받아 수용소에 도착했다. 자위대의 지시를 받아 몇 사람씩 의주로 가는 트럭을 타고 의주 피난민 수용소에서 모두 만났다. 의주에서 신의주까지는 꽤 되는 거리였지만, 신의주에 가야만 남하하는 기차를 탈 수 있다고 해서 또 트럭을 타고 신의주 수용소까지 갔다.
남쪽으로 가는 기차는 내일 오전 몇 시에 있다는 것과 각자 알아서 여관에서 자라는 이야기만 들었다. 하얼빈을 떠난 후 처음으로 방 같은 방에서 이불을 덮고 잘 수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밥을 먹고 지시한 장소로 갔더니 벌써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정거장까지 걸어가면서 자연히 행렬이 이루어졌고, 그 순서대로 기차에 탔다.
남쪽으로 가는 기차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망에 부풀어, 지난 보름간의 고생스러웠던 것도 잊고 서로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의주에서 대구까지는 아직 얼마를 더 가야 되는데…. 그리고 38선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고향으로 간다는 즐거움만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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