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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함께여서 행복하여라 - 제1화
행복한 어린 시절 이야기


글 양 수산나|대봉성당

스코틀랜드 출신의 여자 평신도인 나는 1959년 스물세 살에 대구대교구(당시 대목구)민의 복음화에 협조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물론 여러 다른 외국 평신도와 함께 당시 교구장이셨던 서정길(요한, 대구대교구 7대교구장) 대주교님의 초청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축복이었다. 사실 그때만 해도 한국은 외국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당시 서 대주교님께서는 200여 년 전 성직자도 없었던 한국 교회의 초기에 놀라운 열정과 용맹함으로 복음화에 앞장섰던 평신도 사도직에 다시 불을 붙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시고 그런 계획을 하신 것 같았다.

 

지금 나는 80세 노인인데 이제는 한국 교회가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을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아메리카와 유럽에까지 파견하는 모습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최근 나는 깊이 존경하는 사람들로부터 〈빛〉잡지에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왜 한국에 왔으며 어떻게 한국에 왔는지를…. 많은 이들은 하느님께서 내가 여기서 뭘 하도록 인도하셨는지 알고 싶어했다. 사실 그러한 요구에 살짝 당혹감을 느꼈다! 하지만 노력해보겠다고 했고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나는 스코틀랜드 가정의 출신이다. 아버지 쪽은 저지대1)의 조그만 도시 귀족으로 영국 정치에 참여하며 맥주 양조장을 경영하셨다. 그리고 어머니 쪽은 고지대2) 시골에 사는, 왕족의 피를 지닌 스튜어트 씨족장의 한 지파에 속했다. 외할머니께서는 그 당시 독일로 유학을 가셔서 음악을 공부하셨고 피아노를 대단히 잘 치셨으며 전통적인 스코틀랜드 하프도 잘 연주하셨다. 외할머니는 고도의 지성을 갖춘 영국의 중산층 출신으로 배경이 너무 다른 스튜어트 씨족의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외할아버지 집안에서 이 결혼을 끝까지 반대하는 바람에 5년을 기다리다가 결혼을 한 후 남아프리카로 도망을 가셨고 나의 어머니는 그곳에서 태어나셨다. 그리고 외할아버지가 가문의 상속자가 됨으로써 비로소 스코틀랜드로 다시 돌아오셨다.

  부모님 역시 낭만적인 연애를 거쳐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셨고 자신들이 물려받은 모든 축복을 나에게 물려주셨다.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물려주셨다. 아버지께서는 22~23세 되셨을 때 자신의 할아버지 보수당 선거운동을 위해 집집마다 방문을 다니셨는데 그때 비로소 빈부의 엄청난 격차를 발견하시고는 충격을 받아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셨다.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가 처음 만난 것은 서쪽 바다 안에 있는 섬의 맥클레인 지파장의 중세 성에서 사흘간의 주말 파티가 있었을 때였다. 어머니 가족과 아버지도 이 파티에 초대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 사흘 동안의 파티에서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한 번은 아버지가 그 파티의 식탁에서 마르크스주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때 외할머니께서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옆에 있던 사람에게 귓속말로 ‘빨갱이구만!’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그 말씀을 들으시고는 얼른 화제를 음악으로 돌렸다. 그러자 외할머니는 그런 아버지가 마음에 쏙 드셨고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할 수 있으셨다.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아버지가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았으므로 2차 세계대전 동안 러시아 군인들을 위해 통역을 하셨다. 그때 아버지는 마르크스주의가 평소 본인이 생각해오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 노동계층에 관심을 갖고 노동당에 입당하셨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후 1945년에는 노동당원으로서 국회의원이 되셨다. 이때 노동당은 영국 복지의 기틀을 확고히 했고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대영제국의 거의 모든 식민지들의 독립도 허용했다.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그 당시 계급의 특권과 교육의 특혜(나의 가족은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이 옥스퍼드 대학 출신이다.)를 받았지만 그것이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한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높은 존엄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이토록 훌륭하고 사랑하는 부모님들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더 이상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신앙없이 자랐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지식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외할머니께서는 내가 아기일 때 성공회 세례를 받도록 우기셨고 나는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내가 열일곱 살에 그리스도를 믿을 때까지 나는 그 세례의 은총에 대해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때때로 사람들이 나에게 “왜 한국에 왔느냐?”고 묻곤 한다. 대답을 하자면 어떻게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그리고 갈라져 있는 여러 그리스도 교회들(개신교 교파들, 성공회, 정교회, 가톨릭) 가운데 어느 것이 예수님께서 세우신 참교회인가를 발견하고 가톨릭 신자가 되도록 인도 받았는지부터 먼저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다음 달에 하려고 한다.

 

1) 저지대(lowland) : 작은 산이 많은 스코틀랜드 가운데 글라스코로부터 에든버러까지 넓게 펼쳐져 있는 낮은 평원.

2) 고지대(highland) : 저지대에 비해 전통 있는 지파들이 많이 사는 산중턱.

 

이번 호부터 양 수산나(영국이름: 수지 영거Susie Younger) 님의 글이 연재됩니다.

양 수산나 님은 평신도 선교사로서 1959년 12월 8일 한국에 입국하여 대구·경북지역 사회복지사업의 초석을 다지는데 크게 공헌했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에 많은 관심과 애독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