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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과 함께 살아가기
‘함께’ 하는 세상


글 이관홍(바오로) 신부|가톨릭근로자회관 부관장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정의하는 말들 중에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각기 살아갈 방도를 찾는다는 말입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간다는 의식이 갈수록 희박해지고 각박해져만 가는 이 시대의 모습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때로는 ‘함께’한다고 자부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공통의 관심사나 이해타산에 따라서 ‘우리’라는 울타리를 만들어 그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하고만 ‘함께’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라는 울타리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한국사회 안에서 어디에도 속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곁에 이미 와 있는 ‘이주민’들입니다.

 

먼저 우리 주변을 돌아봅시다. 요즘은 시내 중심가나 공단 지대뿐만 아니라 농·어촌 지역에서도 외국인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외국인들 중에서도 관광객이나 단기 방문자들을 제외하고, 한국에 1년 이상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들을 이주민이라고 합니다.

  

외국인들, 그리고 이주민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은 어떻습니까? 한국 사람들 역시도 유색인종이지만 유난히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이 많다고 합니다. 무의식 중에 우리는 피부색이 흰색에 가까울수록 무엇인가 특별하고 우월한 사람으로 바라보고 피부색이 어두울수록 가난하고 게으르고 열등하게 바라보곤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우리나라에 한때 ‘살색’이라는 색상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논란의 중심에는 우리가 살색이라 부르는 색이 정말 우리의 피부를 대표할 수 있는 색이냐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솔직하게 이야기 하자면 우리가 그동안 살색이라는 색은 칠해보면 알지만 우리와 같은 아시아인들의 색이라기보다 백인들의 피부색과 비슷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살색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고 또 교육 받아 왔습니다. 이후 살색에 대한 논란은 2002년 한국기술표준원에서 ‘연주황색’이라고 공식적으로 해당 색 이름을 정하면서 그 이름이 사라졌지만 우리는 아직도 살색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사람들이 이주민들을 ‘우리’에 포함시키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는 피부색과 함께 ‘종교적인 문제’입니다. 약 20년 전부터 대구대교구 내의 수많은 이주민들이 한국 신자들과 똑같이 성당을 찾고 있고, 신앙생활을 해오고 있습니다. 특히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 남미 출신 이주민들에게 신앙이라는 것, 그리고 성당이라는 곳은 문화의 일부분이며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이주민들은 매주 성당을 찾아, 자신들의 언어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고국의 향수를 달래는 동시에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고 본인들의 정체성을 지켜 나가고 있습니다. 가톨릭 국가 출신 이주민들은 이처럼 신앙생활을 통해서 타국생활에서 큰 힘을 얻고 있지만 IS(이슬람 국가)의 지난 11월 파리 테러 사건 이후로 많은 이주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일부 언론에서 모든 미등록 체류 노동자(소위 불법 체류자)들을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로 보도하였기 때문입니다. 미등록 체류자들은 합법적으로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 서류(비자)가 없을 뿐이지 노동자로서 한국사람들이 꺼리는 3D 업종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한국사회에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안감은 가톨릭 국가에서 온 이주민들보다 이슬람 국가에서 온 이주민들에게는 정말 피부에 와 닿게 크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한 국도변의 작은 휴게소에서 직접 경험했던 일입니다. 이주 노동자로 보이는 체격이 큰 남성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모두 피해가거나 무시를 하고 지나쳐 갔습니다. 제가 한참을 바라보다 그 남성에게 다가가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 보았더니 현금 지급기에서 돈을 좀 찾으려고 하는데 사용 방법을 몰라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 1시간이 넘도록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남성의 부탁대로 현금을 찾아주면서 짧은 영어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남성은 방글라데시에서 온 이주 노동자였습니다. 종교가 이슬람이냐고 물어 보았더니 맞다고 대답하면서, 자신은 절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제가 “앗살라무 알라이쿰(아랍어로 원뜻은 “신의 평화가 당신과 함께”라는 의미이며, 이슬람 문화권에서 일반적으로 기본적인 인사말에 사용됨)”이라고 인사를 하니, 저에게 이슬람이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 신부라고 했더니, 어떻게 자기네 인사말을 알고 있느냐며 반가워했습니다. 저는 “앗살라무 알라이쿰”을 가톨릭 전례상 용어로 번역하면 평화의 인사(Peace be with you!)라고 했더니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기뻐했습니다. 이어서 저는 한국에서 일하면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친구는 공장에서 쌀라트(기도 시간)를 배려해주지 않는 것, 회식을 할 때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힘든 것은 한국 사람들이 이슬람교도들을 모두 테러리스트로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왠지 모르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서 힘든 일이 있으면 연락을 하라고 명함을 주고 헤어졌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복음의 기쁨』(252항~253항)에서 이슬람교 신자들에 대해 “폭력적인 근본주의의 불안안 사건들에 직면하여 우리는 참된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애정으로 적대적인 일반화는 삼가야 합니다. 진정한 이슬람교와 쿠란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온갖 폭력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언급하셨습니다.

한국사회 안에서 이주민들은 이처럼 인종적인 편견, 종교적인 편견, 그리고 체류자격의 문제로 여러 가지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주민들에 대한 ‘우리’의 울타리는 높아져만 가고 있습니다. 이주민들은 ‘각자도생(各自圖生)’의 메마른 시대의 희생양(scapegoat)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신앙인이라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자녀답게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삶의 자세를 버리고 인간에 대한 모든 편견과 불신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진정으로 ‘함께’하는 세상의 밑거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이번 호부터 “이주민과 함께 살아가기”가 여러분 곁을 찾아갑니다. 애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