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교회의 성직자 중심화(2)
* 평신도의 위치
“로마교황 아래 성직자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회.”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바로 이전 시기까지의 교회를 잘 드러내는 말이다. 교회 안에서의 평신도의 역할은 성직자에 비해 너무나 미미한 것이었다.
물론 당시 교회가 평신도를 엄연히 교회의 일원으로 제시하기는 한다. 외형상으로는 공의회 이전의 교회가 평신도를 교회의 한 일원으로 포함하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상을 갖추었었다는 말이다. 한 예로 구 교회법(1918)은 교회가 성직자 혹은 교회계급으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평신도도 본질적으로 교회에 속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니, 법규 제683조항은 목자들과 양들,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함께 교회를 건설한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할지라도 실제적으로 교회를 유지하고 보호한 당사자들은 순전히 교회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었고, 그와 반대로 평신도들은 교회조직에 있어서 중요치 않은 사람들이었다. “교회의 ‘고유하고 영적인 국면(eigentlichen, geistlichen Dimension)’의 대리자로서 그리고 영적인 능력의 소지자로서 성직자들(Geistliche)은 명백하게 평신도 위에 있었고, 일부는 심지어 교회와 명확하게 동일시되었다.(성직자교회)”1) 성직자와의 차이를 강조하는 듯한 ‘평신도’라는 단어가 표현하듯이, 평신도들은 성직자들에게 국외자(局外者)들이었던 것이다. 때때로 성직자들은 평신도들을 심지어 ‘적(敵)’으로 이해하기까지 하였는데, 보니파시우스 8세 교황은 ‘Clericis laicos’라는 교서(1296)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평신도들이 성직자의 적들이라는 것은 멀리는 고대(古代)가 증언하고 있고, 현재의 경험도 그것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2)
하지만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서로 대립하는 곳, 그곳에서 어떻게 성령이 활동하실 수 있을까? 교회조직과 성직자중심화에서 비롯한, 성령에 대한 눈에 띄는 소홀함의 결과들은 상당하였고, 종교개혁가들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았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다음의 글을 인용한다. : “교황청과 그 밖의 성직자들이 종교적인 정신과 사목의 열정을 적게 가지면 가질수록 금전에 대한 그들의 욕심도 그 도를 더해갔고, 제국교회재정계획(Fiskalismus)의 사상은 분노를 일으켰다. 그들은 머리를 짜낸 요금과 세금제도 그리고 다소간의 자발적인 기부금, 종국에는 대사헌금들로 교황청의 금고를 채우고자 했다. 많은 경비를 필요로 하는 속된 궁중생활과 지나친 건축활동, 나아가 과다한 전쟁비용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계속해서 재정궁핍 중에 있었다. 종교개혁 발발의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한 대사거래의 스캔들이 이 제국교회재정계획과 관련된다는 것은 확실히 우연이 아니다.”3)
* 전례에 끼친 영향들
이러한 성직자 중심화는 또한 전례의 계속적인 발전에도 저해가 되었다. : “교회의 성직자 중심화는 또한 전례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 다름 아닌 전례도 점점 더 성직자에게 고유한 일이 되었고, 백성은 수동적인 구경꾼으로 퇴화되었으며, 마침내 완전히 탈락되어버렸다. … 중세기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자신을 어떻게 체험하였던가? 교회는 미사성제의 테두리 안에서 신자들의 공동체로 자신을 배워 알았는데, 이 공동체는 믿음과 세례 안에서 하느님을 통하여 그리고 하느님을 위하여 거룩하게 된 공동체이다. 또한 교회는 신적인 구원경륜 혹은 구원계획의 부분으로 그리고 천상과 현세 사이에서의 성사적인 일치로 자신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이 미사성제적인 교회체험은 교회적 생활의 성직자 중심화와 법제화 그리고 개별화의 진행 중에 점점 더 소멸되어 버렸다.”4)
평신도가 전례적인 형성에 능동적인 참여를 못하고 실제적으로 제외되어 있었던 이러한 상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일반적인 사제직을 강조함으로써 비로소 개선되었다. 공의회에서 전례는 “예수 그리스도 사제직의 완성”(전례헌장 7)으로, “교회생활의 정점과 원천”으로 나타난다. 전례를 통하여 성직자와 평신도들은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리스도가 완성하시고 교회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실현된 구원활동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한다.5) 전례적인 축제가 순전히 거룩한 행위이기 때문에 교회는 전례적인 공동체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모인 공동체”에 온통 주의를 기울인다. 전례가 오직 성직자에게만 집중된 곳, 그곳에서는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서 일하시고 우리 모든 약함을 떠맡고 계신다.”는 사실은 망각된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다.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대신해서 간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음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 그러한 성령의 생각을 잘 아십니다.”(로마 8,26-27)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서 - 성직자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평신도를 위해서도 - 기도하신다는 인식에서 알 수 있는 것은(무엇보다도 하느님께 공식적으로 기도를 올리는) 전례가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바로 성직자들 안에서만 활동하시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 속에서도 활동하시는 것이다.
지금까지 성령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잊혀져 왔었는지, 다시 말해 ‘성령의 망각(Geistvergessenheit)’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다음 호부터는 교회론과 성사론 안에서 일찍이 성령의 역할을 어떻게 파악하였는지, 또 어떻게 해서 그 역할을 소홀히 여겨왔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이번 호에서는 켄터베리의 대주교 Stephan Langton(+1228)이 지은 성령께 바치는 기도6)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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