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교자의 영광이 너희를 비추고 있다.”(2014년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주제)
좋은 것은 밖으로 드러내기 마련이다. 아내인 말가리다와 함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만나는 형제나 자매에게 성지순례의 체험을 간략하게 들려주면서 가능하면 부부가, 또는 두세 명으로 국내 성지순례 완주를 한 번 해보라고 권했다. 우리네 삶에 있어서 그저 얻어지는 것이 없듯이 성지순례도 마찬가지다. 완주하려면 건강해야 하고, 시간을 내야하고, 순례에 따른 비용도 감당해야 한다. 매년 정기적으로 단체나 본당별로 성지순례를 하고 있으나 꾸준히 국내 성지를 전부 순례하고 느끼는 감동과 깨달음은 사뭇 다를 것이다.
성지순례 완주자의 입장에서 순례를 독려하며 권장한 것뿐인데 입소문이 퍼지면서 성지순례를 하려는 자매들이 하나둘씩, 이 본당 저 본당에서 연락을 해왔는데, 그중에는 여든이 넘는 어르신들도 계셨다. 이분들은 성지를 가고 싶어도 차가 없거나 누군가와 더불어 가야 할 처지였는데, 시간이 차츰 지나면서 한 팀이 구성되었다. 우리는 멀고 긴 순례를 함께해야 하는 부담도 느꼈으나 성지순례를 완주한 경험을 살려 ‘누군가의 몫’을 우리 부부가 대신하기로 했다.
2014년 9월 22일 새벽 미사 후 본당 승합차로 11명이 솔뫼성지를 시작으로 순례를 시작했다. 서너 달은 월 2회로 순례하다가 월 1회로 바뀌었다. 성지규모와 성지조성에 따라 도보순례 코스가 있는 곳, 없는 곳이 다양하므로 시간 조정을 잘해야 했고, 인근에 성지가 한두 곳 더 있으면 다시 순례 오기가 어려워, 순례시간이 연장되어 늦은 시간에 도착할 때도 있었다.
이렇게 함께 순례하면서 한국교회의 시작과 박해가 일어난 과정 등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포함하여 이미 성지순례를 마친 완주자들도 주입식으로 성지를 순례하고 확인도장 찍기에 더 급했는지도 모르겠다. 성지순례 책자 뒷부분에 순교자와 증거자의 신분, 순교일, 순교지가 나와 있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그 시대와 배경, 교우들 간의 관계를 안다면 이해가 더 빠르기 때문이다. 몇 권 안 되는 순교서적을 다시 보고 인터넷에서 보충 자료를 찾아가며 틈틈이 간추리고 간추리는 작업을 했다. 그리하여 10월, 성지를 향해 가는 차 안에서 급하게 만든 원고의 초반부인 A4크기 6매 분량을 말가리다가 읽도록 맡겼다. 목소리가 크고 발음이 정확한 편이어서 듣기에 좋았으나 3분 정도 지나자 목이 아프다며 뒷사람에게 넘겼고, 잠시 후 다시 뒤로 넘어가 돌아가며 읽었는데 사람마다 목청이 다 다르고 자동차 엔진 소리와 섞어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소통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한 달을 더 계속하다가 성과를 거두지 못해 아쉽게도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11월부터는 승합차를 임대하여 운행했는데, 타 본당에 다니는 요셉피나 자매가 순례소식을 듣고 뒤늦게 합류하려 했으나 인원이 다 찼다는 말을 듣고 성지순례 희망자들을 열심히 모아 아예 한 팀을 만들었다. 이런 남다른 노력과 열정으로 순례 2팀이 생겨나 2015년 7월 21일 첫 순례를 시작했다. 순례 2팀 중에는 대구에서 두 분, 칠곡에서 한 분의 자매가 합류하고 있다. 이분들은 성지순례를 하기 위해 적어도 새벽 3~4시에 깨어 준비할 것이며 역으로 나가 기차를 타고 구미로 온다. 어둠이 걷히지 않은 이른 아침에 역사 계단승강기를 내려오는 두 분과 선산에서 버스를 타고 나와 합류하는 어르신을 볼 때마다 200여 년 전, 신앙 선조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신부님이 모처에 도착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오직 신부님을 만나려는 열망으로 초저녁에 징검다리를 건너고 들판을 가로질러 산을 오른다. 오매불망하던 신부님을 만나 고해성사를 받고 영성체를 모시기 위함이다. 혹시 누가 밀고하여 급히 떠나시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설렘으로 밤새워 산길을 뛰고 걸어서 땀에 젖은, 지치고 초라한 몰골로 여명에 만나는 그 모습 말이다. 모양새는 다르지만 이분들은 신앙 선조들을 많이 닮았다. 그뿐인가! 요양원에서 밤새 어르신들을 돌보고 퇴근하자마자 순례에 나서는 자매도 두 분 있다. 그들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시간을 낼 수 없기에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시작한다.”고 했다. 나는 이분들을 보면 힘이 난다. 12시간 넘게 운전하는 것도, 순례자들의 안전을 위해 과속방지턱 하나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사소한 부분까지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뀐다.

언젠가 날짜 조율이 안 되어 할 수 없이 같은 주에 1팀은 월요일, 2팀은 화요일 이렇게 이틀 연속으로 운전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더 안쓰러운 것은 승합차의 좁은 공간에서 장시간을 견디어야 하는 순례자들의 불편함이다. 그래서 미루지 말고 인원을 충원하여 승합차보다는 공간이 여유롭고 안전한 버스로 새롭게 시작하기로 부부가 의견을 모았다. 성지순례 단장 역을 맡은 말가리다는 아까부터 순례자과 일일이 통화하며 상황설명과 날짜조율, 인원충원을 위한 일로 여념이 없고, 나는 나대로 해야 할 일이 생겼다.
다음 달에는 성지순례를 많이 한 팀, 조금 한 팀, 처음 시작하는 팀, 이렇게 세 팀이 한 버스를 탄다. 소속 본당이 다르기에 낯선 얼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통점은 한국 천주교 성지를 전부 순례하기 위해, 순교자들과 증거자들의 삶을 본받기 위해 같은 목적으로 버스를 탄다는 점이다. 승합차로 한 팀씩 순례할 때는 가족적인 분위기였는데 인원이 두 배 이상 늘면서 어느 공동체와 같을 것이다. 한 본당에 신자들을 그 본당에 단체장이 인솔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안다. 바라고 바라는 것은 서로 배려하고 화목한 분위기로 성지순례가 영글어 가기를 바라며, 성모님의 도우심과 순교자들과 증거자들의 전구에 앞날을 맡길 뿐이다. 이즈음에 <빛>잡지 기자로부터 성지순례 연재 청탁을 받았다.
이 지면을 빌어 성지순례 완주수기가 수면(水面) 위로 올라오도록 손을 잡아주고, 2015년 10월~11월호에 「1차 전국 성지순례를 마치며」를 실어주신 <빛>잡지 관계자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 부족함이 많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기회로 알고 서랍 안에 오래 넣어두었던 펜을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잡는다.
* 약력 : 제15회, 제16회 전국 근로자 문화예술제 「생활수기」, 「소설」 동상 수상.
* 이번 호부터 성지이야기 “함께 가는 성지”가 다시 시작됩니다. 애독자 여러분들의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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