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 이야기 속에서 한국은 나에게 놀랍고도 큰 기쁨을 주는 자리를 차지한다. 이제 앞서 약속한 대로 내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는지에 대해 말해야겠다.

그런데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 1950년 열네 살 되던 해에 나는 이미 한국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다. 당시 나의 아버지는 외무부 차관으로 총리와 함께 대서양을 건너가셨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남한의 자유를 위해 유엔(UN)이 어떤 식으로 개입해야 할 것인지를 토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군인들이 한국전쟁에 참여하는 유엔군에 가입할 때 외삼촌과 사촌 오빠 두 사람이 한국을 위해 참전했다. 그 귀중한 한국이 나중에 나의 사랑하는 제2의 고향이 될 줄이야! 훗날 내가 한국에 가기로 결정했을 때 외삼촌이 해주신 말을 지금도 기억한다. “수산나야, 한국은 대단히 아름다운 나라지만 엄청 춥단다!”
1953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나에게 드러내셨을 때 내 나이 만 열일곱 살이었고 고등학교 3학년 여름학기의 끝자락이었다. 시험은 이미 끝난 후였다. 하지만 기숙학교에 머물던 때라 집에 갈 수는 없었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열네 살 때까지 외동딸이어서 ‘공주병’에 걸릴까봐 염려하시며 나를 기숙학교에 보내셨다. 그렇게 기숙학교에서 머물던 나는 시험이 끝난 어느 날 무척 심심해서 선생님께 읽을 책을 추천해 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생애』라는 책을 추천받았는데 그 선생님은 그 책의 저자도, 신자도 아니었다. 그렇게 그 책을 읽고 난 뒤 나는 그 ‘예수’란 인물이 상당히 매력적이어서 한 친구에게 “제발 성경 좀 빌려 달라.”고 했다. “뭐, 네가 성경을?” 친구는 어이없어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고집을 피우며 청했고 결국 친구는 나에게 『성경』을 빌려줬다.

그렇게 『성경』을 빌려온 다음 날, 마침 수업이 없어서 아침을 먹은 후 마태오복음을 읽기 시작했다. 마태오복음을 끝내고 마르코복음을 읽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나를 쓰러뜨리셨고 나는 점심도 잊어버리고 계속 읽어나갔다. 그리고 루카복음…. 오후 간식도 빼먹고 또 계속 읽었다. 그날 요한복음의 끝에 이르러 나는 거의 토마스 사도처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뻔 했다. 하지만 망설였다. 내가 감정에 치우치기 쉬운 십대라서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염려되었다. 그 다음 날 벅차오르는 그 강한 인상을 내 마음에서 몰아내려고 애쓰면서 나는 하루 종일 테니스를 쳤다. 하지만 테니스도 소용이 없었다. 둘째 날 늦은 저녁, 침대에서 나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분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 첫 기도의 순간에 존재하시는 대로의 그분,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아는 것이 내게 허락되었다. 나는 그분께 굴복했다. 영원히. 그것은 1953년 7월 10일의 일이었다.
다음날 나는 어머니께 전화를 해서 “엄마, 내가 아기 때 세례 받은 게 사실이에요?”하고 여쭈었다. 어머니는 놀라서 “왜! 벌써 시집가려고?!”1)라며 물으셨다. “아니, 엄마! 이제 내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으니 견진을 받고 싶어요!” 그러자 어머니는 못마땅한 소리를 중얼거리셨지만 그래도 “그래, 세례 받았지!”라고 말씀하셨다. 그 다음 주일에 나는 성공회 성당에 가서 견진준비반에 등록을 했다. 교회 안에서 신앙을 제대로 살고 싶었다. 갈라져 있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 모든 교회들 중 어느 것이 하느님의 뜻에 가장 맞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없이 사랑하올 하느님을 알게 된 기쁨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리고 성공회 신부님과 그 부인은 나를 아주 따뜻하게 환영해 주었다.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된 순간부터 나는 이 기쁜 소식을 ‘땅 끝까지’ 전하고 싶었다. 물론 영국과 스코틀랜드도 그 소식을 들어야 하지만 그들에게는 기회가 많다. 나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직 어리고 가난한 곳에 가라는 부르심을 느꼈다. 나는 그분께서 내가 선교사가 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나는 기다렸다. 슬프게도 하느님의 백성은 단절된 공동체로 갈라져 있었고 서로서로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먼저 나는 그분께서 어떤 식으로 당신 백성의 일치를 원하셨는지 알기 위해 기도했다. 그러는 동안 12월에 옥스퍼드대학 입학시험이 있었다. 3시간짜리 시험이 있을 때마다2) 나는 몇 분 동안 시험 답안을 쓰지 않고 무릎을 꿇고 성령께 내가 옥스퍼드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면 도와달라고 청했다. 사실 나는 평소 실력 이상으로 시험을 잘 쳤다. 그분께서는 나를 옥스퍼드로 이끌어 주셨다. 장학생 수준으로까지. 나는 성령께 먼저, 그리고 부모님과 선생님들께 감사드렸다.
1953년 12월, 영국 대학의 새 학기는 그 다음 해 10월에 있었으므로 그동안 여행을 하기로 했다. 내겐 외삼촌이 주신 돈이 좀 있었다. 부모님께 서양문화의 뿌리가 깃든 예루살렘, 아테네와 로마 여행을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부모님이 이야기 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분들은 내가 이 여행을 하게 되면 외교관계로 알게 된 신앙 없는 부모님의 친구들과 내가 만나게 될 것이고 또 로마가톨릭의 별로 매력 없는 모습들과 별로 현대적이지 못한 그리스도정교회 등을 직접 접해 봄으로써 내 머리와 마음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벗어던져 버리는데 꽤나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을 하신 것이다. 딱한 부모님들, 실망하실 텐데…. 이렇듯 우리는 서로의 생각이 다르긴 해도 대단히 사랑하는 가족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여행 허락이 떨어졌다.
1) 성공회 성당에서 결혼하려면 ‘세례증명서’를 제출해야 한다.
2) 그 해에는 우리 고등학교에서 옥스퍼드대학 지원자가 나뿐이어서 옥스퍼드에서 온 시험지를 두고 한 분의 선생님 앞에서 나 혼자 시험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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