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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함께여서 행복하여라 - 제6화
구두닦이들과 둥지를 틀다


글 양 수산나|대봉성당

 

왜, 그리고 어떻게 내가 한국에 오게 되었으며 여기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글을 써 보라는 청을 받고, 마침내 왜 왔으며 어떻게 왔는지를 말해 보려는 노력이 끝났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내게 드러내셨고 나를 당신 교회 안으로 이끌어 주셨으며 내가 복음을 위해 땅 끝까지 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어떻게?” 한국 내의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말해 준 한국 학생을 통해서다. 그 이야기가 내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내게 한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 준 한 오스트리아 친구를 통해서. 그 친구는 내게 사도적 교구 성소를 보여 주었고 그것은 내게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평신도 사도들이 유럽에서 오기를 바라신 한 한국 주교를 통해서다. 그분은 여러 사람을 당신 교구에 초대하셨고 그 중 몇 사람을 당신 교구 안에서 평신도 사도 성소로 불러 주셨다. 그래서 이제 “내가 여기서 뭘 했나?” 먼저 나는 효성여자대학(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영어와 불어 교수로 초대를 받았고 마리아 하이센베르거는 벌써 독어 교수로 초대를 받았었다.

도착하니 이미 겨울방학이 가까웠지만 우리는 둘 다 효성여대 학생 기숙사에 방을 배정 받았다. 추웠지만 좋은 석탄 난로가 방 안에 있었다. 음식은 단순했지만 좋았고 며칠 내로 ‘된장’(처음엔 냄새가 싫었다.)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고 지금까지 그렇다. 기숙사 학생들은 우리를 아주 따뜻하게 환영해 주었고 학장이신 전석재(이냐시오) 신부님께서는 우리를 잘 보살펴 주었다. 몇몇 학생들은 그 시절부터 평생 우리들의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마리아와 나는 전쟁 후 그 시기, 광범위하게 퍼진 가난에 깊은 인상을 받아(대구의 길에는 폭탄이 떨어진 구멍들이 그때도 남아 있었다.) 효성여대에서 가르치면서 더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그래서 서 주교님께 우리가 집을 하나 사서 집이 없어 다리 밑에 살고 있는 두세 가족과 함께 살든지 아니면 견디기 어려워 고아원에서 도망쳐 깡패들에게 착취당하는 구두닦이 아이들과 같이 살아도 되는지 여쭤 봤다. 

주교님께서는 “다리 밑에 사는 가족들은 사랑이 있지만 어린 소년들은 사랑해 줄 사람이 없으니 그 애들을 위해 뭔가 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고향에 있는 친구들이 우리를 위해 줄 수 있는 돈을 모두 모아서 삼덕성당 옆에 방 3개, 옛날식 부엌이 딸린 한옥 한 채를 샀는데 화장실은 마당 끝에 있었다. 방 2개는 커서 한 방에 8명씩 들어갈 수 있었고 셋째 방은 겨우 요 두 장만 깔수 있는 크기였다. 우리 셋은 요 두 개 위에 비좁게 붙어서 잤다. 마리아와 나, 그리고 모니카. 이 분은 그전에 한 일로 해서 구두닦이 세계를 알고 있었으며 기꺼이 우리와 함께 일하기로 한 한국 복지사였다. (그 당시에는 사회사업 한다는 표현을 썼다.) 그분의 딸은 지금 첼로 연주자인데 그때는 아기였다. 지금은 그 딸도 친구다.

하지만 어린 구두닦이들을 착취하는 패거리들로부터 어떻게 해방시킬 것인가? 모니카 씨 말이 “소년 몇 사람을 데려오는 유일한 방법은 적어도 대구 깡패 두목 중 한 사람이 아이들 몇 명이 우리에게 오도록 허락하고, 여전히 그 아이들을 보호하도록 허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바란 것은 그 아이들이 몇 시간이라도 구두닦이를 해서 우리 “가족의 돈 통”에 조금이라도 보태고 우리는 학교 봉급을 그 통에 넣는 것이었다. 모니카 씨는 그전에 고아들과 일을 해서 마음씨 따뜻한 깡패를 알고 있었고 그가 제일 어린 아이들 몇을 우리에게 보내 주고 그 아이들을 다른 깡패들로부터 보호해 주기로 했다.

또 다른 깡패로부터 온 아이들을 우리는 폐공장지대에 있는 건물 뒤에서 은밀히 만났는데 성탄 밤에 도망칠 수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성탄 밤에는 교회에서 주는 물건들을 얻기 위해 외출이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실은 경찰이 그들을 도와주려고 개입하는 바람에 더 위험한 깡패 두목이 우리에게 화가 나게 되었다. 우리는 가톨릭구제회에서 얻은 따뜻한 옷 한 보따리를 주며 겨우 그를 달랬다. 그러나 그는 기어이 아이 하나를 우리에게서 뺏어갔다. 그리하여 우리 새 가족이 크리스마스에 시작되었는데 열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 되는 아이들 16명이 두 개의 깡패 소굴에서 왔다. 그들은 서로 사이좋게 잘 지냈다.

내가 마당에 있는 펌프로 이 귀여운 남동생들의 옷을 처음 빨려고 했을 때 벼룩들이 뜨거운 물에서 도망가려고 빗발치듯 튀어 올랐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사랑스러웠고 생기발랄했다. 그들은 감히 고아원에서 도망을 친 똘똘한 아이들이었다. 고아원들은 시내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군인들에게서 구걸을 할 수 있기에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것뿐이었다. 이 열여섯 명의 아이들은 벌써 매일 버는 수입으로 야간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물론 우리는 그들이 공부를 계속하도록 격려했다.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우리 돈 통에 할 수 있는 만큼 아낌없이 넣었다. 우리 수입이 더 많아서 그들은 더 나은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우리들의 보금자리에 김상하(알로이시오) 박사와 그분의 친구 안드레아 씨가 〈하가용家龍-양노아老鵝〉라는 문패를 달아 주셨다. 하 마리아가 집안 살림을 잘한다고 가정을 지키는 용이고, 나는 늙은 거위처럼 시끄럽게 떠든다고 노아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 두 분 의사는 우리 아이들의 건강을 돌보아 주신 고마운 분들이었다. 이 집에 사는 아이들의 최고 가치 중 하나는 깡패의 의리였다. 그래서 보통 구역 문제로 깡패끼리 붙을 때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면 밤 몇 시든 상관없이 뛰쳐나가서 다치고 피를 흘리며 돌아왔다. 우리는 이 짓을 하지 말라고 할 수 없다고 느꼈다. 그런 깡패의 의리는 깡패 세계에서 배워 온 최선의 가치이며 최강의 가치였기 때문에.

나중에 마리아가 대구SOS어린이마을을 설립했을 때 이 사랑스런 우리 동생들이 SOS마을 가정들의 ‘형들’이 되었다. 그들 중 많은 아이들이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내가 다른 일을 시작했을 때 마리아가 한 번은 열여섯 살에 우리 집에 왔던 또 한 명의 아이가 마침내 교리를 배운다고 기쁘게 말했다. 오랫동안 그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러나 어느 날 그가 밤에 마리아를 데리고 나가서 말했다. “누님, 바로 이 골목 여기서 내가 아주 나쁜 짓을 했어요.” 그는 또 다른 어두운 모퉁이에서 같은 말을 했다. 그리고 또 다른 골목에서 “여기서도 그랬어요.” 그러고 나서 “누님, 내가 하느님께 돌아서면 누님의 하느님이 나 같은 놈도 용서하실까요?” 마리아는 깊은 감동을 받고 거듭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때서야 그는 “그렇다면 세례 준비를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마리아와 나는 곧 주교님으로부터 다른 사명을 받고 갈라졌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