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역에 도착하고 보니 역 광장은 인산인해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데, 그래도 일행 중 몇 사람이 이리저리 뛰어 다니면서 인솔자를 찾았다. 우리가 타야 할 열차까지 걸어가야 한다고 전해 듣고는, 언제 어느 차를 탈지도 모르면서 마냥 기다리기만 했다.
기다리는 중에 사고가 생겼다. 소련군인들이 따발총을 들고 조선사람들의 짐과 가방을 뺏고는 달려드는 사람들을 향해 공포를 쏘기 시작했다. 우리는 멀리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행여나 닥쳐올지도 모르는 사태 때문에 겁에 질려 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또 지내다 보니 점심도 제대로 못 먹고 신경만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또 다른 소련군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혼비백산하여 도망가려고 했지만, 갈 데가 없다. 사람들은 죽는다고 소리만 질러대었다. 그러자 소련군이 손을 내저으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모두 조용해지자 아까 들린 비명소리 때문에 우리를 보호하러 나왔다는 것이었다.
그때 인솔자가 와서 우리가 타야 할 기차가 곧 도착하니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기다리다가 오후 5시부터 기차에 타기 시작했다. 오후가 되니, 이미 추수가 끝난 만주 땅은 쌀쌀해지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할당된 열차라고 해서 보니 객차가 아니라 화물열차였다. 계단도 없는 화물차에 짐짝처럼 밀어 넣는 대로 밀려 들어갔더니 콩나물 시루가 따로 없다. 그래도 조선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는 안도감에 사람들의 표정이 그리 어둡지만은 않았다.
이윽고 6시가 되어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물열차 바닥에 앉지도 못하고 짐짝처럼 끼여 서서 차가 흔드는 대로 흔들거리다보니 조금씩 자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짐짝 위에 앉는 사람, 기대는 사람, 남이야 어떻든 나는 멀미를 하니 누워야겠다는 얌체족하며, 서로 이 화물차를 타기까지 얼마나 고생했는지 저마다 죽을 뻔했다는 얘기로 남의 동의를 구한다. 진작 만주에서 떠나야 했다는 둥 누구 때문에 못 떠나고 이 고생을 한다는 둥 조선사람 특유의 남을 탓하는 말은 잊지 않는다. 모두 다 낯선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전부가 조선으로 나가야겠다는 마음만은 간절하기에, 서로 고향을 묻고 만주에서는 무슨 일을 했는데 갑자기 이런 일이 생겼으니 전부 다 버리고 간다는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저녁밥도 거른 채 밤새도록 기차는 달렸다. 아침 7시경 어딘지 모르는 허허벌판에 차가 섰다. 그때 인솔자가 와서 하는 소리가 “여기서 잠깐 머물 테니, 용변을 보고 먹을 것도 있으면 해먹어라.”고 한 다음, 가버렸다. 사람들은 차에서 내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우선 용변을 보는데, 참말 가관이다. 세상에 이런 광경이 또 어디 있겠나? 한번 상상해보시기 바란다. 2,000여 명이 나무 한 그루 없는 허허벌판에 동서남북 제멋대로 쭈그리고 앉아서 용변을 보는 광경이란 세상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사먹을 곳도 없으니 가지고 온 것을 먹을 수밖에 없었는데, 준비해 온 사람도 있고 준비해오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제각기 먹을 궁리를 하는데 어떤 사람은 벌써 작은 나뭇가지들을 주워와서 냄비에 물을 부어 삶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밥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 연기가 난다고 불평소리도 들리고, 그야말로 피난기차가 아니라 마치 피난촌 마당같이 2,000여 명이 흩어진 벌판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독자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들판에 샘이 있을 리 만무하고 흐르는 강도 없으니, 물도 없다. 물론 세수도 못하고 마실 물조차 각자 가져온 것 외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밥을 하는 사람은 물을 어떻게 가져왔는지 쌀을 씻지도 않고 밥이 될 만큼 물을 부어 냄비에 끓이고 있었다. 그럭저럭 10시가 되어서 차가 떠난다고 길게 기적이 울리며 기차를 타라는 신호가 있었고 차는 또 떠났다.
이렇게 몇 날 몇 일, 하루에 두 번 내지 세 번 허허벌판에 서고, 신경(지금의 장춘)을 지나 한참 가다가 어딘지도 모를 벌판에 차를 세우고 갈아타야 한단다. 2,000여 명이 내리고 2,000여 명이 움직여서 2,000여 명이 다시 차를 타려면 얼마나 시간이 많이 걸리겠는가! 오전에 도착해서 오후에 떠난다고 했으니, 그나마 사람들이 짐을 이고, 쥐고, 끌고 다른 차로 갔는데 갑자기 뒤에서 소란스러워지며 비명소리가 나서 보니까 소련군 한 부대가 화물차 한 칸을 덮치고 있지 않은가!
물건을 뺏고 아녀자를 데리고 가는 꼴이 보인다. 누가 그들을 도와주겠는가! 우선 우리만 당하지 않을 양으로 그 무거운 짐을 들고 뛰는 모습이 처절하기까지 했다. 사람에게 불행이 닥치면 ‘나부터 살아야지.’하는 마음이 앞서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남이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당시에는 그렇게 아프게 생각되지도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겨우 제 것을 추스른 다음이라야 남의 불행이 눈에 보이기 때문에…. 이렇게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기 중심주의적인 동물인 모양이다.
얼마가 지나 인솔자가 와서 하는 소리가 “우선 소련 사람들에게 끌려가지 않아야 하는데, 총을 들이대고 끌고 가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당할 수밖에 없으니 눈치를 보고 빨리 피하는 것이 상책이지요. 무슨 놈의 점령군이 이따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라면서 조심하라는 말만 남기고 가버렸다. ‘이것이 아마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피난 행렬인가 보다.’하고 포기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만주가 평지이긴 하지만 높지 않은 언덕에 다다랐을 때 기차가 올라가지 못하고 몇 번을 시도하다가 뒤로 미끄러졌다. 그러자 인솔자 와서 “기차에 너무 많은 사람이 타서 평지에서는 그런 대로 가는데 언덕에는 올라가지 못합니다. 미안하지만 남자들은 내려서 기차를 좀 밀어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남자들은 다 내렸다. 그때 중학교 2학년 나이에 내리지 않아도 되었겠지만, 나도 내려서 미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싶어 내려서 나도 같이 기차를 밀었다. 밀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아마 내 생전에 기차를 밀어볼 때가 또 있을까?’ 하고.
그 많은 사람이 기차를 밀자, 기차는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차가 멈춰 서더니 다시 타라고 길게 기적을 울렸다. 기차는 또 달리기 시작하고, 사람이 사는 도시가 아닌 허허벌판에만 가끔 서서 몇 시간씩 기다려 주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내려서 밥도 해먹고 용변도 보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일을 되풀이하다가 그럭저럭 단동(옛날 안동)에 도착했다.
이 도시는 한국과 중국을 잇는 마지막 도시로, 역에서는 조선에서 온 기차를 타야 된다고 모두 내리라고 했다. 또 여기서 새로운 차를 교섭해야 피난민들이 압록강 철교를 넘을 수 있다고 하면서 수용소에 들어가라고 했다. -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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