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근(楊根)의 지명(地名)을 찾아보니 예로부터 남한강변에 폭우와 홍수로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버드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버드나무 뿌리’에서 유래되었으며, 버드나무는 일단 뿌리만 내리면 어떤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속성수여서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을 버드나무에 비유한다고 했다.
필자는 어느 날 아내와 올레길을 걷다가 예정에 없이 산에 오른 적이 있다. 경사진 길을 7부 능선쯤 올라왔으나 이정표가 보이지 않자 되돌아가려고 잠시 쉬고 있는데, 한 가족으로 보이는 무리가 올라오면서 정상에 정자가 어디쯤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바라던 대답을 듣지 못하자 잠시 의견을 모으더니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들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마치 자석에 끌리듯이 그들을 뒤따라 올라갔다. 그들은 정자가 목표였으니 도착하자마자 저마다 편한 자세를 잡고 앉았으나 그들로 인해 정상까지 잘 올라온 우리 부부는 모처럼 올라온 김에 다른 길로 내려가자며 하산을 반대쪽으로 잡았는데, 생각 외로 멀고도 긴 산행을 했다. 이처럼 우리의 삶도 서로에게 자극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데, 그 열정에 따라 순서가 뒤바뀌기도 한다. 오늘 만나는 선조가 그런 분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신앙 선조이자 형제인 두 분의 고향 양근성지를 찾았다.

권철신(암브로시오)의 신앙생활
권철신(1736-1801)은 남인(南人) 학자며 성호 학파 신진 학자인 이총억(李寵億), 이존창(李存昌), 홍낙민(洪樂敏) 등을 제자로 삼아 녹암계(鹿菴係)를 형성했고, 이후 이승훈(李承薰), 이윤하(李潤夏), 이벽(李檗) 등도 그에게 학문을 배웠을 만큼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기 고향 양근(楊根)에서 멀지 않은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학문 연구 모임인 강학(講學)을 자주 주도했고 그 후 천진암에 모여 종교 서적인 서학(西學)을 놓고 천주(天主)의 존재, 인생의 기본 문제 등에 관해 연구를 하는 한편, 천주교 진리를 희미하게나마 깨닫고 천주교 계명을 아는 대로 실천하기 시작했는데, 이 모임이 바로 유명한 천진암 강학회다. 그러나 창립 주역 이벽 선조를 제외하면 그들의 신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벽 선조는 학덕이 높은 학자에게 전교하여 천주교의 기반을 굳힐 생각으로 1784년 9월, 양근에 사는 권철신을 찾아가 입교를 권했다. 권칠신은 처음에는 좀 주저하다가 얼마 후 ‘암브로시오’로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기대와 달리 직접 전교에 나서지 않았고, 또 천주교에 관한 일에도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천주교가 좋긴 하지만 금할 것과 버릴 것이 너무 많다 보니 덕망 높은 학자로서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외출을 자제하고 늘 집에서 학문과 종교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신심이 깊거나 얕거나 간에 천주교 창립에 직·간접으로 가담했으니 박해자들이 그냥 둘 리 없다. 천주교의 반대파들은 통문(通文)으로, 때로는 상소로 그를 천주교 두목으로 내몰았으나 그때마다 정조(正祖)의 비호로 화를 면했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여 1801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천주교인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는 한편, 이참에 눈엣가시였던 반대파 남인 시파들도 함께 제거하려고 칼을 뽑았다. 신유대박해로 순교의 칼을 받은 영광스런 순교자가 있는가 하면, 억울하게 잡혀 와 어처구니 없게 죽는 사람도 많았다. 권철신(암브로시오)을 비롯하여 이벽 선조와 3일 밤낮을 토론했던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 저명한 남인 학자들이 모두 잡혀 와 국문(鞠問)을 받았다. 권철신은 국문에서 천주교 신앙을 거부했으나 매를 많이 맞아 2월 22일(음) 66세로 옥사했다고 전해진다. 약전의 기록은 여기까지다. 그가 신앙을 거부했다 해서 아주 신앙을 버렸는지, 아니면 절체절명의 순간에 회심했는지, 그것은 하느님의 영역이기에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동생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신앙과 양근성지
그러나 동생 권일신(?-1792)은 달랐다. 그는 1784년 9월 이벽 선조의 권유를 받자 즉시 천주교에 입교하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로 세례를 받았다. 권일신 선조는 천주교를 알리는데 열성적이었고, 특히 이존창(李存昌)과 유항검(柳恒儉)을 입교시켜 복음을 충청, 전라 지방까지 확대하는 데 공헌했다. 1785년 명례방(明禮坊) 김범우(金範禹) 집에서 종교집회를 가졌을 때 그는 아들 권상문(權相問)과 함께 참석했으며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성물이 압수되자 당당하게 형조를 찾아가 성물을 반환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박해의 전운이 감도는 상황에서 이런 적극적인 행동을 보인 그의 용단은 실로 대단하다. 그 후 권일신 선조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 때 이승훈으로부터 신부로 임명되어 한때 성사를 집전한 적도 있었다.
1791년 진산사건으로 신해박해(辛亥迫害)가 일어나자 배교자 홍낙안(洪樂安) 등이 권일신 선조를 천주교의 교주(敎主)라고 고발하여 결국 잡히고 만다. 포도가지에서는 포도송이가 달리고, 척박한 환경에서 잘 자라는 도깨비바늘에서는 도깨비바늘만 달리듯이 배교자 부모한테는 배교자 자식이 나오기 마련인가 보다. 그의 자식 원모도 김순성과 결탁하여 신자들을 고발, 처형시키는 데 한몫을 단단히 했으니 말이다. 가톨릭대사전에 김순성, 김여삼을 검색하면 배교 사실이 자세히 나오는데 그 기록을 보면서 참으로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밀고로 잡힌 권일신 선조가 심한 고문에도 배교하지 않자, 사형시킬 것을 상소했으나 정조(正祖)는 사형을 허락하지 않고 제주도로 유배를 명했다. 옥에서 나와 유배지로 떠나기에 앞서 서울에 머무는 동안 형조는 그에게 팔순 노모를 내세워 불효를 구실로 회유하자 이에 굴복했다고 전해진다. 감형(減刑)되고 유배지가 예산(禮山)으로 바뀌었다. 그는 노모를 만난 후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옥에서 받은 상처로 객사(客死)하는데 때는 1792년 봄이었고 그의 형인 권철신보다 9년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형제의 유해는 1981년 대감마을 뒤편 효자봉 자락에서 이장되어 지금은 천진암 성지 이벽 창립 선조 묘 우측에 나란히 안장되어 있다. 권일신 선조가 어떤 굴복을 했는지 알 수 없으나 만일 배교했다면 곧 석방되지 않았을까? 더욱이 유배가 취소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유효한 것을 보면 더 그렇게 보인다. 필자의 소견으로 볼 때 유배 장소가 바뀐 것은 고문으로 받은 상처가 너무 깊고 혹독한 데다 며칠 견디지 못할 것을 미리 알고 가까운 지방으로 잡은 미봉책이 아니었나, 그렇게 믿고 싶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애착과 집착을 많이 하며 산다. 사전에 보면 집착은 어떤 것에 계속해서 얽매여 계속해서 마음 쓰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나 자신에도 해당하며, 부모와 배우자, 자녀들에게도 두루 적용된다. 실상 내가 해야 할 몫을 다했으면 그것으로 된 것인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의 이름으로 내 방식대로 사고하거나 내 생각대로 간섭하다가 뜻대로 안 되면 걱정과 불안이 점점 커지면서 결국 내가 지치고 병들어 간다. 관심을 두고 기도하되 내가 해결 못 할 부분이라면 그것을 인정하고 집착과 애착의 끈을 놓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으니 매여 있는 끈을 하나하나 푸는 만큼 더 자유롭게, 더 멀리, 더 높이 날기 위해서인데 이 작업은 안타깝게도 본인 스스로 할 수밖에 없다.
이미 언급한 대로 양근성지는 최초로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곳이며,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가 시행되어 내포의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을 통해 충청도로, 호남의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을 통해 전라도로, 각각 신앙이 전파되면서 천주교가 전국으로 퍼져 나간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양근은 동정부부인 복자 조숙(베드로)과 복녀 권천례(데레사)의 출생지이며 신앙을 증거하다가 체포되어 순교한 곳인데, 권천례는 권일신 선조의 딸이며, 조숙은 그의 사위다. 그리고 권일신의 2남인 복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을 비롯하여 북경에 밀사로 자주 다녀온 복자 윤유일(바오로)의 동생, 복자 윤유오(야고보), 사촌 동생 복녀 윤점혜(아가타) 등이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순교자의 영성은 이어져야 한다.
2월 천진암을 시작으로 6월 양근성지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 창립 선조 이벽(세례자 요한), 이승훈(베드로), 정약종(아우구스티노), 권일신(암브로시오), 권철신(F. 하비에르) 이렇게 다섯 분을 모두 만났다. 그냥 신앙생활 을 하는 것보다 한국천주교회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대충이라도 알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더 은혜로울 것이다. 또한 그냥 성지순례를 하는 것보다 한국교회의 뿌리를 알고 순례를 하는 것이 더 유익하고 신앙 선조들을 보는 눈과 마음가짐도 그만큼 달라질 것이다. 필자는 창립 선조들의 글을 쓰면서 선조들의 열성과 믿음에 감탄하여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가 많았다. 선조들은 천주교를 배우고 받아들이면서 벼슬길을 포기했고 효가 으뜸인 유교사상을 거스르고 조상제사마저 폐지했다. 누가 감독하거나 채근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창립 선조들은 서학(西學)을 통해 신앙을 소명으로 받아들였으며, 스스로 그 길을 가면서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그분들의 고귀한 죽음을 통해 순교자들이 버드나무 뿌리처럼 생겨났으며 그분들이 뿌린 피와 흘린 땀의 토양 위에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서 있음을, 오늘을 사는 우리 신앙인들이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 양근성지 -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물안개공원길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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