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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몬시뇰의 세상이야기
물따라 세월따라(8)


김영환(베네딕도) 몬시뇰

세월은 흘러흘러 벌써 서울 온 지도 3년 째, 소학교 6학년이 되었다. 기차에서 떨어진 것도 옛이야기가 되었다. 중학교에 가야 했다. 서울에는 좋은 학교도 많고 유명한 학교도 많았다. 6학년 겨울 방학이 되었으나 중학교 시험을 쳐야 하니, 만주에 가지 못하고 어머니께서 경성에 오시겠다는 편지가 왔다. 나는 어머니가 오신다니까 좋아라 했다. 여름에 있었던 서울대교구 교리 경시대회 때 아동부 1등을 한 자랑을 하려고 아직 어머니께서 오실 날이 멀었지만 마음이 들떠 있었다.

6학년 학생들은 중학교 입시 모의고사 시험도 다달이 쳤고, 방과 후에도 남아서 공부했다. 하지만 휴일에는 학교에 안 갔을 뿐 아니라 종종 미사 후 스케이트도 타러 다녔었다. 겨울이 되면 노량진 한강 인도교 밑에 링을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이 스케이트를 즐겼다. 사는 곳이 돈암동이라 한강까지는 너무 멀어서 주로 창경원 연못을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오시고 외삼촌 집은 잔치 분위기였다. 어머니께서 만주에서 가져온 떡이니, 엿, 고기 삶은 것 등으로 먹을거리가 많았다. 그때는 2차 세계대전 중이었기에 쌀, 고기, 소금 등은 나라에서 배급제를 실시했었고, 조선사람들은 참말로 배를 곯던 시기였다. 돈이 있어도 사 먹을 것이 거의 없었고, 행여 있다손 치더라도 몰래 갖다 파는 물건값은 엄청나게 비쌌기 때문에 서민들은 엄두도 못 냈다.

 

나는 방학 때마다 집에 가서 한가위 같은 풍성한 분위기에 젖어 있다가 서울만 오면 배를 곯았다. 13살 짜리 애가 서울 가서 배를 곯았다면 부모로서 마음이 좋을 리 없다. 그래서 서울에서 배고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모를 리 없었던 어머니는 그때마다 위인전 이야기, 성인 이야기를 하시며 우회적으로 참으라고 타일렀다. 그런데 내 친구 용주는 서울에 공부하러 온 지 1년만에 배가 고파서 서울에서는 더 이상 공부를 못하겠다고 오지 않았다. 그렇게 배곯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경성 친척집에 갈 때는 가급적 먹을 것을 많이 가져간다. 어머니도 그 심정이었으리라.

 

어머니와 같이 있을 때는 즐거웠다. 어머니께 교리 경시대회 이야기를 하고(그때 나와 공동 1등을 한 사람은 현재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이다.) 아버지와 친한 사이였던, 지금은 돌아가신 전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님을 찾아뵈었다. 노 대주교님은 어머니께 내가 교리를 잘 한다고 칭찬을 많이 하셨다. 어머니의 흐뭇한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노대주교님께서 신부일 때 계성 국민학교에서 교리를 가르치고 계셨는데, 그때 내가 계성 국민학교로 전학을 갔었고, 교리시간마다 교리문답을 잘 했기 때문에 그렇게 칭찬하신 것 같다.

 

동성 중학교에 들어갔다. 교회에서 경영하는 학교였다. 그때 교장선생님은 장면 박사이고, 아버지와는 친한 사이였다. 한 학년에 두 반씩 있었다. ‘갑’조는 일반 학생, ‘을’조는 신학생들이었다. 내가 들어갈 때부터 ‘을’조는 없어지고 일반 학생들만 받았다. 그때쯤 대구 유스티노 신학교도 문을 닫았다. 일제 말기에 조선의 가톨릭계 학교뿐만 아니라 가톨릭 전체가 탄압을 받던 시절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외삼촌 집을 나와 기숙사에 들어갔는데, 명동성당 구내에 있는 이층 목조 건물이었다. 명동성당을 향해서 우측, 지금은 주차장이 있는 곳에 기숙사가 있었다. 사감은 박고완 신부님이셨다. 시골에서 신자 학생들이 서울 유학을 하면 하숙을 해야 하는데 부모님들 생각에 하숙생활 하는 것이 마음이 놓이질 않으니, 신부님이 사감인 기숙사에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친척집보다 기숙사를 선호했다. 나는 외삼촌 집이 더 편했지만 기숙사에 가고 싶었던 것은 기숙사가 성당 구내에 있고, 수녀원에 이모 수녀님이 계셨고, 일년 전부터 누나가 여자 기숙사에 왔기 때문이었다. 여자 기숙사는 수녀원 울안에 있었고 수녀님이 사감이었다.

 

기숙사에 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콩깻묵을 섞은 한 공기밖에 안 되는 밥에 시락국(시래깃국), 김치가 전부였다. 식사 시작 후 2분이면 더 먹을 게 없다. 아침 식사 때 점심도시락을 같이 먹었다. 물론 수업 4교시 후 점심 시간에는 굶었다. 저녁에 기숙사에 와 봐야 한 공기 밥에 김치, 시락국이 식단의 전부였으나 한참 클 때 그것으로 때를 이었다.

 

기숙사에서 배가 고파서 생긴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이런 일도 있었다. 지금은 명동 주교관 테니스장이지만 그때는 그 둘레에 감나무가 많았다. 7월 방학 전에 저녁을 먹고 감 따먹으러 가자고 하여, 한 친구가 감나무에 올라가서 파란 감을 몇 개 따서 밑으로 던졌다. 그 순간, 주교님과 주교관에 근무하는 신부님들이 저녁식사를 마치고 감나무 밑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즉시 도망을 갔지만, 감나무 위에 올라간 친구는 내려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감을 따지도 못하고 꼼짝 못한 채 모기한테 쏘이면서 신부님들이 들어가시기만을 기다렸다. 한 반시간 후에 들어가시는 것을 보고 숨어 있던 우리들은 나무 밑에 갔다. 그랬더니 그 친구도 나무에서 내려왔는데, 모기한테 쏘여도 긁지도 못하였으니, 얼마나 가려웠을까! 얼굴이 여기저기 부어 있었다. 그 꼴을 보고 우리는 재미도 있었지만, 미안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달리 위로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파란 감이 익거든 네가 다 먹어라.”하고 위로 아닌 위로의 말을 건넨 적이 있었다. 또 한 번은 나와 두 친구가 밥을 몰아먹기로 한 적이 있었다. 아침 식사 때 두 사람이 한 사람에게 도시락을 주기로 했다.

 

먹는 사람은 아침밥과 점심도시락 그리고 다른 두 사람의 도시락을 한꺼번에 먹는 것이다. 즉 아침밥 + 자기 도시락 + 2 도시락, 말하자면 한 번이라도 실컷 먹자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엔 다른 한 사람이 실컷 먹고, 이틀은 쫄쫄 굶어야 했다. ‘첫 번째 날은 누가 먹느냐?’하고 말하다가 내가 첫 번째로 먹기로 했다. 그날 아침은 진짜 배가 불렀다. 하지만 학교에서 돌아와서 ‘내일, 모레, 이틀은 죽었구나.’하고 내일을 걱정했다.

다음날, 아침에 미사에 참례하고 돌아와서 식당에 갔더니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밥을 먹다가 도시락을 내미니 한 친구가 “나는 안 먹는다.”하고 도로 나에게 도시락을 되돌려 주었다. 이유인즉 아침에 도시락을 안 먹었더니 종일 배가 너무 고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먹으면 너희들은 배고플 것이 아니냐?”하며, “어제 먹은 영환이는 잘 먹었지만 나는 안 먹겠다. 그리고 이 제도는 인간적이지 못하다.”고 그만두자고 제의했다.

 

곤란한 것은 나였다. 어제 남의 도시락 두 개를 먹어버렸으니,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나는 그만 두자고도 못 하고, 계속 하자고도 못 하고 “나는 오늘 내 도시락을 안 먹을 테니 둘이서 갈라 먹어라.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겠다.”고 했더니, “한 사람이 배곯은 경험을 하고 친구에게 배곯은 경험을 시키지 않으려고 선심을 베푸는 것이 아니냐?”면서 다른 한 사람도 그만두자고 했다. 나는 속으로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 ‘나는 먹어서 다행이다.’하는 두 가지 마음이 엇갈렸다.

 

그때 그만두자고 제안한 친구는 김현근(바오로) 전 비엔나 대사였다. 아까 말한 감나무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모기한테 쏘인 친구 역시 이 친구였다. 그 때 우리는 한창 장난이 심했던 모양이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