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배고팠던 이야기는 누구나 많이 들었겠지만 전쟁 말기가 닥쳐오자 조선 사람들을 조금도 가만 두지 않았다. 어른들은 징용에 끌려가고 탄광에서 일하고 혹은 군수공장에서 혹사당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군사훈련은 물론이거니와 총금술을 거의 매일 아침, 전교생에게 실시하였다. 학과목이라야 중학교 때 별 것이 있겠냐만, 예를 들면 수학 같은 것은 총알 속도가 얼마이고, 비행기 속도가 얼마인데, 몇 도 방향에서 날아오는 비행기를 얼마 만에 맞출 수 있는가 하는 그런 계산을 하도록 가르쳤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멀리서 나타나는 적을 식별하기 위해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것, 심지어 일본 해군들이 쓰던 수신호(백기와 붉은기로 의사소통을 하는 방법), 모스 부호 등도 배웠다. 한 마디로, 모든 학생을 학교 졸업과 동시에 입대해도 좋으리만큼 훈련시켰다.
처음에는 고급학년, 즉 4·5학년이 주로 동원되었지만 다음에는 하급학생 할 것 없이 전교생이 동원되었다. 동원된 학생들은 아침부터 ‘학도동원(學徒動員)’이라는 완장을 달고 미리 정해둔 장소로 모였다. 거기서 선생은 지도를 보고, 때로는 시청 직원의 지시를 따라 집들을 뜯는 작업을 하였다. 그때 일본 사람들 생각에는 미군들이 우리 조선에도 폭탄을 떨어뜨리리라고 생각하고 일본 동경에서 당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소개사업(疏開事業)을 한 것이다. 소개사업이란 서울지도를 놓고 도심에서 외각까지 잣대를 대고 이리저리 줄을 긋고 그 줄그은 자리의 집을 뜯는 사업이다. 왜냐하면 서울 같은 도시에는 집들이 촘촘히, 다닥다닥 붙어 있기 때문에 한 곳에 폭탄이 떨어져 불이 나면 걷잡을 수 없어, 시내 전반에 걸쳐 불이 퍼질 것은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집들을 뜯는 작업에 학생들이 동원된 것이다.
사실 집을 뜯기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처음 몇 사람이 지붕 위에 올라가 기왓장을 던져주면 밑에서 차곡차곡 순서대로 쌓고 문틀을 뜯고 네 기둥에 밧줄을 걸고 동서남북으로 당기면 그 자리에서 집이 폭삭 내려 앉아버린다. 집 하나 뜯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나중에 그것을 치우기 위해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전부 다 우리 손으로 처리해야 했다.
서울 거리의 많은 집들을 학생들의 손으로 뜯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대문에서 신당동, 왕십리, 안국동, 종로 일부 그리고 지금 명동의 삼일로는 바로 수녀원과 접해 있는 도로이기 때문에 우리 학교 학생들이 동원되어 뜯었다. 매일 같이 밖에 나와서 집이나 뜯었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여의도(지금 국회의사당이 서 있는 곳)에 작은 비행장이 있었다. 그것 역시 우리 손으로 만들어졌고 수원의 군인 막사를 우리가 지은 것도 있었다. 때로는 새로 짓는 신사(神社)도 학생들 손으로 만든 곳이 많았다. 처음에는 주일에 놀았지만,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격주로 놀고 주일 역시 학교에 나갔다.
학생들이 공부를 못하고 소개사업(疏開事業)만 하다가 보니 먹지도 못한 상태에서 건강도 나빠지고 때로는 단체로 식중독에도 걸렸다. 공부한다는 마음보다 일 안 했으면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일에서 돌아온 우리는 배가 고프기 때문에 가끔 마포장터에 가서 쌀을 사오는데, 물론 그것은 배급 쌀이 아니고 비공식적으로 파는 쌀이었다. 그렇게 구한 쌀을 우리는 때로 알루미늄으로 만든 도시락에 씻지도 않은 쌀을 넣고 전기 풍로 위에 얹어 밥을 하기도 하고 겨울에는 스토브 위에서 밥을 하기도 했다. 반찬은 집에서 가져온 고추장이었고, 그마저 다 떨어지면 주로 주방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김칫국물을 얻어먹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한되나 되는 쌀을 구해서 서울 주교관 빈방에서 밥을 해서 김칫국물로만 밥을 먹었는데, 네 사람이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마루에 앉아서 먹다가 ‘아, 배부르다.’하고 일어서려니 일어서지도 못했다. 배가 아파 꿈쩍도 못하겠다. 너무 많이 먹은 탓이다. 독자들은 미련하게 그렇게 많이 먹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그때 배고팠던 만큼 배고파 본 적이 없었을 것 같다. 어쩌다 한두 끼 굶었다고 해서 배고픈 그런 것이 아니다. 정신적으로 먹을 것이 없다고 머릿속 깊이 입력되었던 것 같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고, 물리적으로 꽉 찼을 때는 이미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위가 꽉 찬 다음이었을 것이다. 어떻든 그때는 실컷 먹어보는 것이 바람이었다.
한번은 기숙사에서 학생들이 너무 배고파하니까 촌에서 누가 보내준 감자와 무, 고구마, 기타 잡곡을 섞어 밥을 지어먹었다. 그런데 그것이 식중독을 일으켜 기숙사에 살던 모든 사람이 식중독에 걸렸다. 마침 바로 옆에 성모병원이 있었는데 우리 학교의 지정병원이었다. 거기서 모두 진단을 받고 약을 먹었다. 식중독은 대부분 그 이튿날 가라앉았지만 평소에 잘 먹지도 못한 채 설사를 많이 한 탓인지 모두 기력이 없었다. 원장님께 부탁해서 집에 가서 휴양하라는 진단서를 얻게 되었다. 학교에 진단서를 제출하고 보름 동안 학교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허가를 받고 많은 학생들이 집으로 떠났다. 나도 망설이다가 집에 가기로 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집에 가는데 3일씩이나 걸리니 망설여질 수밖에…. 학교에 진단서를 제출하고 학생 할인권도 받았다. 사실 그 식중독 덕에 집에는 빨리 갔지만 해방 후 만주에서 한국까지의 피난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1945년 7월 13일 오전, 하얼빈행 기차를 탔다. 집에 간다는 그 자체가 행복했다. 차는 북으로 달렸다. 낯익은 개성, 남천, 사리원, 신막을 지나 평양에서 잠깐 쉰 다음, 종일을 또 달려서 국경 역인 신의주에 도착하고 통관절차를 밟았다. 그런데 보통 때와는 달리 일본 헌병들의 인상이 평소와 같이 오만한 모습이 아니었다. 패전이 가까웠을까! 기차는 압록강 철교를 ‘덜커덩’거리며 지나갔다. 만주 땅 안동(지금의 단동)에 도착해서 보니 중국사람들의 움직임 역시 심상치 않았다. 만주 땅에 있던 일본헌병들도 더 긴장해 보이고 평소에는 어깨에 메던 총을 모두 ‘앞에 총’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더 민감해진 것 같았다. 안동에서 승차한 어떤 조선사람이, 나도 조선사람인 것을 알고 이것저것 말문을 열더니 안심을 한 듯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어제 안동 번화가에서 중국 사람이 일본 장교와 말다툼하는 것을 보았는데, 갑자기 중국 사람이 일본 장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너희는 이제 곧 망한다.’하고 소리를 질렀다 한다. 다음 순간, 일본 장교는 ‘일본도(日本刀)’를 빼더니 중국 사람의 왼쪽 어깨에서 허리까지 내리쳐서 두 동강을 내고 명함 한 장을 꺼내 던져 놓고 유유히 사라졌다고 했다. 그 옆에는 중국 경찰도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 광경을 보고도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서있더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가 직접 못 보아서 그렇지, 주권국가인 중국에서 중국 사람들이 일본 헌병들과 군인들한테서 당한 멸시와 푸대접은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가 조선에서 일본 사람에게 당하는 것보다, 중국에서 중국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에게 당한 것이 훨씬 더 심했다. 만주에서 일본 사람들은 기차에 타자마자 자리가 없으면 앉아 있는 중국 사람을 툭툭 차면서 일어서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가 그 자리에 앉는다. 세 사람이 앉을 자리에 혼자 다리를 뻗쳐 기대어 앉는다. 이런 광경은 내가 직접 본 것만 해도 부지기수다. 한 마디로 일본 사람들은 좀 심한 말로 하자면 중국 사람을 개, 돼지로 취급했다. 더럽고, 아무 데나 침을 뱉는 야만인 취급을 했다. 아마 이렇게 당하는 것은 식민지 치하에 있는 조선 사람과 중국 사람 모두 한 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더 한심한 것은 중국에 사는 조선사람 중 더러는 일본 사람 행세를 하면서 중국 사람을 괴롭혔다는 사실이다. 지금 생각해도 참말 창피한 일이다. 해방이 되면서 조선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한테서 받는 섭섭한 대접도, 일제 때 조선 사람들이 중국에서 나쁘게 행동한 결과라고 본다.
나는 최근까지 북경에 살면서 나이든 중국사람들과 대화를 하다가 그들 가슴 깊이 아직 이런 종류의 섭섭함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무한히 죄스러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