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열기
서울 신부가 신랑에게,
“자기야, 저 별이 예뻐, 내 눈이 예뻐?” 그러자 서울 신랑,
“그야 자기 눈이 더 이쁘지” 하며 포옹을 했다.
이를 본 경상도 신부,
“보이소, 저 별이 예쁩니꺼?, 아이마 내 눈이 예쁩니꺼?”
그러자 경상도 신랑,
“와? 별이 니한테 뭐라 카드나?”
이런 이야기처럼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사람들! “밥도! 아는? 자자!” 귀가해서 이 세 마디만 구사한다고 할 정도로 자기표현을 최대한 절제하는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 그러나 저를 포함한 경상도 사나이들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 진득한 무언가가 있다고들 항변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항변에 요즘 들어 왠지 더욱 회의적이 되어 가는 저 자신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대화’라는 단적인 말이 점점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지만, 미운 사람은 가까이 있어도 말하기 싫어집니다. 어떤 부부는 싸우고 나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가정은 마음이 오가는 대화를 얼마나 나누고 있는지요?
“자라면서 윗사람 눈치 안 보고 자유롭게 내 감정과 생각을 표현해본 경험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남편과 먹고살기 바쁜 이야기말고 뭔가 마음이 오가는 대화를 하고 싶은데…. 애 아빠는 퇴근하고 늘 TV 앞에 앉아 있지요. ‘우리 이야기 좀 해요.’ 하고 말 꺼내자니 어색하고 그러네요.”
어느 자매의 이 고백처럼 부부간에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기가 그리 쉽지 않은가 봅니다. 부부의 경우가 그러하다면 아이들은 어떨까요? 지난 어린이날을 즈음하여 전국교직원 노동조합에서는 주목할만한 조사내용을 발표하였습니다. ‘가족 간의 대화’에 대하여 초등학생 1천 7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초등학생 1백 명 중 22명은 하루 중 부모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거의 없고, 25명은 10-20분 정도 대화하며, 30분 이상 대화하는 학생은 34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또 ‘가족이 다 모이면 주로 무엇을 하느냐?’는 질문에 초등학생들의 38.4%는 ‘TV를 본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기술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한다면, 아이들이 가정에서부터 자기 표현 능력을 기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적절한 자기표현은 갈등이 내적으로 심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공동체 내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활력소가 됩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가정에서부터 자기 표현 능력을 기를 수 있을 때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당한 자신을 가꾸어 나갈 수 있습니다.
생각하기
사람들은 자신과 이웃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원활히 할 수 있을지, 또 다른 사람과 결실을 맺는 친밀감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아울러 신앙인인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과 친밀해질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져 봅니다. 이러한 물음에 저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마음속의 모든 비밀을 서로 거리낌없이 말하는 것을 하느님께도 적용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인은 기도 중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할 때도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허물없는 대화와 비슷한 현상들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비적 기도나 높은 단계에 이르는 기도도 있지만,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이 생활 안에서 하느님과의 친교를 나누고, 그 현존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한다면 이러한 적용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과 친밀함을 갖게 된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이에게 하듯, 하느님께도 자신의 진정한 감정과 생각을 거리낌없이 드러낼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친교이며 대화임을 이해하며 함께 묵상할 수 있는 성서구절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아론의 누이요, 여예언자인 미리암이 소구를 들고 나서자, 여자들이 모두 소구를 들고 나와 그를 따르며 춤을 추었다. 미리암이 노래를 메겼다. ‘야훼를 찬양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기마와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다.’”(출애 15,20-21)
“야훼께서 욥과 말씀을 마치신 다음에 데만 사람 엘리바즈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너의 두 친구를 생각하면 터지는 분노를 참을 길 없구나. 너희는 내 이야기를 할 때 욥처럼 솔직하지 못하였다.’”(욥 42,7)
“야훼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 당신만이 나의 행복이십니다.’”(시편 16, 2)
“나에게 하신 놀라운 일들 모두 전하며 고마우심 노래로 찬미하리이다.”(시편 26,7)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하고 말씀하셨다.”(마르 14, 36)
수난 전날 예수님께서는 게쎄마니 동산에서 성부를 향하여 ‘압바(abba)’라고 부르며 기도하셨습니다. 압바는 아람어로 가정에서 자녀가 아버지를 친밀하게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입니다. 우리말의 ‘아빠’와 비슷한 어감을 지닙니다. 아직 어리기만 한 아이가 아버지께 완전히 의탁하고, 아버지를 진정 사랑하고 존경하며 아버지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빠!’하고 부르듯이, 외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진실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아버지와 전적으로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압바!’하고 부르십니다. 아이는 아빠라고 불러야 할 아무런 의무나 이유가 없는데도 그냥 아빠라고 부르기를 좋아하고, 그렇게 부르는 데 행복을 느낍니다. 아빠란 한 마디에 아이의 여러 심정과 감정이 담겨 있으며, 가끔 이 심정과 감정을 직접 드러내기도 합니다.
‘아빠, 아빠가 좋아요!’(사랑), ‘아빠가 최고야!’(찬양), ‘아빠, 고마워요!’(감사), ‘아빠가 있으니까, 무섭지 않아요!’(신뢰, 의탁), ‘아빠를 믿어요!’(믿음), ‘아빠, 미안해요!’(통회), ‘아빠, 장난감 사줘요!’(청원) 등등.
이러한 모든 심정과 감정의 표현은 그대로 기도의 내용이 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심정과 감정으로 압바를 부르며 기도함으로써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앞에 진정한 감정(Authentic feeling)을 드러내며, 자유로운 대화를 나눔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가 더욱 친밀해지고 보다 생기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이 저 멀리 하늘 나라에 계신 분이 아니라, 항상 우리 옆에서 살아있는 한 ‘인격체’로 받아들여질 때(그분께서는 항상 이러한 분이시지만 우리의 경솔함 때문에 이를 깨닫지를 못합니다.), 참된 기도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이때에야 우리 또한 그분 앞에 비로소 존재하게 되고, 그분과 참으로 통교하며 그분께서도 우리와 참으로 통교하실 수 있습니다.
실천하기
2차 바티칸 공의회문헌 사목헌장 19항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하느님과 더불어 대화하도록 초대를 받는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하느님과의 대화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가정교회 안에서부터 서로 깊이 통교하지 못하고 사랑을 나눌 수 없다면, 아이는 보다 더 생기 있는 신앙생활로 나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부부사이의 솔직하고 개방적인 대화가 자녀들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부부가 서로간에 깊이 신뢰하고 상대방의 말에 귀기울여 주는 모습은 아이가 편안하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아이는 자신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부모가 자신의 이야기를 존중해준다는 느낌이 들 때 자신감을 갖고 생각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대화 문화에 그다지 익숙하지 못한 우리에게 T.V.라는 방해꾼은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을 끄고 생활하면서(일정한 시간만이라도) 가족과 함께 시간을 의미 있게 사용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가족이 다함께 모이는 시간에 텔레비전을 볼 것이 아니라, 책을 읽거나 함께 산책하며 하루 일과를 나눌 수 있다면 우리 삶이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녁식사 시간 다함께 모여 오늘 자신에게 일어난 가장 재미있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가족이 함께 대화해 보십시오. 아이들에게 대화하는 법 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 유머를 찾아보는 법 또한 가르쳐 주어 더욱 생기 있는 삶을 열어 가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Turn off TV, Turn on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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