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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몬시뇰의 세상이야기
물따라 세월따라(10)


김영환(베네딕도) 몬시뇰

하얼빈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해북진으로 향했다. 기차가 하얼빈 시가지를 벗어나 송화(松花)강 철교를 지나니, 예나 지금이나 강물은 풍부했지만 누런 흙탕물이었다. 대해(大海)는 청탁을 가르지 않는다고 했던가. 들판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지평선을 이룬 옥수수, 감자, 수수밭 위로 한가로이 하늘에 떠 있는 뭉게 구름은 한없이 맑아 보였다. 경성의 복잡했던 거리를 생각하니, 여기 만주는 너무나도 평화스럽고 여유로웠다.

해북진에 내려 선목촌으로 가는 마차를 탔다. 항상 다니던 길, 깡산 언덕에 도달하자, 저 멀리 보이는 선목촌은 정말 아름다웠다. 만상이 푸른색 벌판에 검붉은 초록색의 버드나무로 성을 이룬 선목촌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신비의 나라’와도 같았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강물이 들판을 가로질러 굽이쳐 흐르고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이는 풍경은 마치 한 폭의 산수화 같다. 이런 목가적인 7월 말, 만주의 농촌풍경을 시인이 보았다면 뭐라고 표현했을까!

 

식중독 덕택에 집에 와서 행복한 시간도 잠깐, 그간의 경성생활 이야기도 다 나누기 전에 엄청난 소식으로 행복은 여지없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일본이 울며 항복하던 패망의 날, 저녁 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또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모두 혼들이 나가서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는지 그다지 놀라지 않으셨고 다만 앞으로가 문제라고 걱정하셨다. 동네에 이 소식이 전해지고 난 후 어른들이 모두 집에 모여와 걱정을 했다. 어떻게 해야 될지, 특히 어떤 사람이 동네 치안이 문제가 아닌가 하며 아버지께 그것을 요점으로 이야기를 나누도록 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이 만주에 와서 살게 된 것은 대부분 조선을 침략한 일본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겨 도망 오다시피 이주했거나, 만주에 오면 농사는 마음대로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만주에 와서 보니, 만주는 일본 사람들이 만든 괴뢰정권이었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만주에서 일본인의 보호 아래 살아야 했고, 조선 사람들 중에는 오히려 일본인 행세를 하며 만주 사람들을 깔보는 이들도 간혹 있었다. 그러자 당시 만주 사람들은 ‘1등 국민은 중국 인민, 조선 사람은 2등이고 3등은 일본놈들’이라고 말할 정도로 일본인을 싫어했는데 조선 사람들까지도 미워하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도 혼란스러웠다. 국민군과 공산군이 국공합작(國共合作)해서 침략한 일본군을 몰아내기로 했었는데, 일본의 패망 후 국민군과 공산군은 다시 서로를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그 괴뢰정권 밑에 일본을 피해서 도망 온 조선 사람들을 보호해 줄 권력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조선이 당장 독립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유언비어만 돌고 과연 누구를 믿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도 몰랐다.

 

일본이 패망하고, 일본인과 만주인이 주객(主客)이 전도되는 상황이 벌어지니, 일본사람 행세를 해 왔던 조선사람들의 걱정이 말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런 일본인 행세를 하던 몇 안 되는 못난 조선인 때문에 선량한 조선인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소문이 나는가 하면, 곧 중국 사람들이 선목촌으로 쳐들어온다는 말도 있었다. 주종(主從)이 바뀌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게 되지 않겠는가! 일본이 패망했으니 만주는 다시 ‘장계석’이 이끄는 중국에 환원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 와중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쳐들어 온 소련군은 닥치는 대로 물건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고 도저히 믿기 어려운 행태를 저질렀다. 만주에 진격한 소련군은 몇몇 고급 장교를 제외하고는 모두 죄수들이었다. 감옥에서 바로 군복을 입혀 만주에 진격시켜 살아 남으면 나머지 형기를 사면해 주겠다고 소련정부가 약속했다고 한다. 이런 극한 상황 속에서 조선 사람들이 살아남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다. 그러니 하루 빨리 조선에 나가는 수밖에 없었고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찾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조선 사람들은 그 와중에서도 조선 사람 특유의 ‘싸움’을 시작하였다.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이 갈라져 두 단체가 정통성을 선전하면서 사람들이 더 큰 혼돈으로 빠지도록 몰아세우며 싸웠다. 그리고 공산진영이나 민족진영, 그 어느 것을 택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일본의 패망 후 우리로서 수습해야 할 우선적인 일은, 중국 당국과 교섭해서 피난민 열차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 두 진영에서는 서로 자기를 따라 오라하고, 믿으라고 하니 누구를 따른단 말인가? 물론 우리 신자들로서는 공산진영으로야 갈 수 없고 민족진영에 의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운동가였던 외삼촌과 같은 일을 하시던 아버지께서는 사람들을 민족진영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그 당시 같은 조선 사람으로서 조선으로 귀국한 사람은 지금의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고, 귀국하지 못한 사람은 세상이 말하는 조선족이 되고 만 것이다. 어렸을 때 선목촌에서 같이 자란 친구 ‘김원용’ 씨는 지금 중국 공민권을 가지고 만리장성 근처, 한국에 사는 조카들이 사준 아파트에서 조선족으로 살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다행히 우리는 10월 중순, 하얼빈에서 조선으로 간다는 피난 열차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조선으로 나가는 제1진으로, 큰 누님과 셋째 누님 가족 그리고 가까운 친척 몇 분이 먼저 떠나게 되었다. 그때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은 겨울을 지내고 봄이 오면 나오기로 하고 우선 우리가 먼저 조선으로 나가서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물론 나는 학교에 가야 하기 때문에 먼저 떠나기로 했다. 아버지는 우리를 하얼빈까지 데리고 와서 며칠 간 기차를 탈 수 있도록 수속을 마친 다음, 다시 선목촌으로 되돌아가셨다.

 

그런데 우리가 하얼빈으로 떠난 다음 날, 선목촌에 중국사람들이 습격을 했다. 이 중국사람들이란 구만주국군들로 그들은 일본에도, 중국에도 속하지 못하기 때문에 도둑질이나 해서 먹고 살 량으로 조선 사람 동네를 습격해서 물건을 모두 약탈해 가곤 했다. 그들이 선목촌도 습격한다는 풍문이 떠돌았고 그들은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데, 그것을 알 리 없는 아버지는 우리를 조선으로 보내기 위해 하얼빈으로 우리와 함께 떠나 온 날, ‘지도자격인 김 아무개가 떠났다.’하며 선목촌을 습격했다. 그런 습격을 대비하여 선목촌에서는 습격을 제일 먼저 알아차린 사람이 성당 종을 울리기로 되어 있었다. 이에 습격이 있던 날, 습격을 알아차린 내 친구 ‘조군옥’이 성당 종을 치기 시작했고 약탈자들은 종치는 사람을 먼저 총으로 쏘고, 또 종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오는 사람을 마구 쏘아 죽였다. 그리고 종횡무진 닥치는 대로 총을 쏘면서 집집마다 약탈했다. 우리집에 총이 있는 것을 알아챘는지, 마지막으로 집 앞에 약 20여 명이 모여서 집중 사격을 했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 방마다 총을 쏘아대었다. 그 때 어머니와 동생들 그리고 같이 살던 사촌 여동생들 모두 여섯 명이 골방에 들어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