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필리오케(Filioque)’ 논쟁
지난 호에서는 “교회 안에서 성령이 망각되었다는 표지”라는 주제로 1.황제와 주인 혹은 통치자(Imperatrix et Domina)로서의 교회, 다음으로 2.성령이 망각된 결과로서의 1054년의 동방이교(東方離敎)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이어서 이번 호와 다음 호에서는 필리오케(Filioque) 논쟁에 대해서 살펴본다.
‘필리오케(Filioque)’라는 말은 ‘~와 성자’라는 뜻의 라틴어로서 성령의 이중적인 발출을 표현하는 교의적(敎義的) 문구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는 신경(信經) 혹은 신앙고백문(信仰告白文)에 이 문구를 삽입하는 문제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간에 마찰이 있었다. 즉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라는 신앙고백에서,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성자에게서도 발출하신다.”는 서방교회의 표현이 동방교회에 문제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마찰은 지난 호에서 살펴본 1054년의 동방이교(東方離敎)를 야기한 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필리오케 논쟁의 배경과 역사 속에서의 전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내에서의 성령의 근원은 무엇인가, 즉 성령이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어떻게 유래하는가에 대한 논쟁을 소위 ‘필리오케 논쟁’이라고 한다. 필리오케 문제가 동방과 서방으로 완전히 분열되기 이전 교회의 신학적 논쟁에 있어서의 중심문제는 아니지만 그 영향은 컸으니, 8세기에 이 문제로 동방과 서방 두 교회 사이에서 격렬한 신학적 논쟁이 생겨난 것이다. 초 세기의 그리스도교 가르침에 있어서의 동방과 서방 교회 간의 신학적 전통과 이해의 차이를 보여주는 이 논쟁에서 교회 안에서 성령이 잊혀졌다는 일면도 드러나며, 이는 결국 두 교회가 가진 성령 이해의 차이점에 관한 문제이다.
필리오케 논쟁은 라틴교회(서방교회)가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25/381)의 신앙고백에 필리오케를 추가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데서 생겨났다. 문제가 된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한 아리우스주의(Arianismus)를 대항하여 개최된 니케아에서의 첫 제국시노드(1차 니케아 공의회, 325)에서 정의되었고 서방교회에서 지배적이던 경향, 곧 “아들(그리스도)은 아버지와 동일본질( )”이라는 사고방식이었다. 라틴교회, 곧 서방교회는 이 필리오케를 통해서 성부와 성자가 신성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했으니, 결국 필리오케 논쟁은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한 그리스도론적인 관심사에서, 또한 라틴교회가 가졌던 삼위일체신학에 있어서의 전형적인 강조점에서 생겨나고 전개된 것이다.
필리오케 논쟁의 배경으로 라틴교회가 가졌던 성부와 성자 상호간의 사랑이라는 성령에 대한 성찰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성부와 성자의 신성에 있어서의 동일성을 고백하는 라틴교회의 입장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특히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430)인데, 이는 그가 성령을 무엇보다도 성부와 성자 상호간의 사랑으로서 이해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며, 이 발출은 성부와 성자 서로간의 사랑이라는 하나의 원리에서 이루어진다.
성부와 성자 간의 사랑으로 성령을 표현한 아우구스티노의 이러한 사고는 안셀모(Anselmus +1109), 아카르트(Achard von St-Victor +1171 ), 리카르트 (Richard von St-Victor +1173), 보나벤투라(Bonaventura +1274), 토마스 데 아퀴노 (Thomas de Aquino +1274)같은 서방교회의 여러 신학자들에게서도 발견되는데, 동방교회는 이 주제에 관하여 거의 숙고하지 않았다.
서방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따르면 성부와 성자는 공동체적이고 상호적인 사랑 안에 서로 결합되어 있으며, 성령은 그 자체로 신적인 호의와 성부·성자 서로간의 사랑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성부는 성자를 낳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한다.”고 가르친 서방교회의 가르침은 당시로서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필리오케가 곧바로 신앙고백문에 첨가된 것은 아니었다. 서방의 사람들, 특히 황제들이 필리오케가 교회의 가르침으로서 전체 교회의 신앙고백 안에 채용되기를 바랐지만, 당시 교황들의 동의는 아직 없었던 것이다.
필리오케는 아리우스주의가 계속해서 스페인에서 세력을 떨쳤기 때문에 톨레도 공의회(447)에 가서야 일종의 공의회적인 신조(信條)로 언급되었고(a patre filioque procedens :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와서), 마침내 6세기 말에 톨레도의 세 번째 시노드(589)에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 본문 안에, 정확히 말하자면 신앙고백문의 보충으로 첨가되었다. : “또한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신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하지만 이는 아직 스페인 내에서의 일이었다.
796년 프랑크 왕국 아킬레이아의 파울리노 총대주교(Paulinus +802)는 프리울리의 시노드에서 필리오케의 신경 안 삽입을 옹호하였고, 800년 경부터는 전 왕국의 미사에서 암송되기 시작하여 다른 교회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847년에 프랑크 왕국의 수도자들이 예루살렘에서 필리오케를 신경 중에 노래하자 동방교회 수도자들이 이에 크게 반대하면서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를 접한 레오 3세 교황은 교의적인 문제에서는 필리오케를 인정하지만 신경 안에 필리오케를 삽입하는 것은 거절하였으며, 필리오케가 없는 원래 형태대로의 신경을 희랍어와 라틴어로 작성하여 성 베드로의 묘지에 기탁된 2개의 은제 테이블에 새겨 넣으면서까지 그 사용을 막고자 하였다. 그러나 필리오케는 미사 중 계속 낭송되게 되었는데, 언제 본격적으로 로마교회에 도입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1013년 교황 베네딕도 3세 때에 황제 하인리히 2세의 청원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한다.
서방교회가 필리오케를 신앙고백 안에서도 인정한 반면에, 동방교회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바와 같이 오직 성부에게서만 발출하시는 성령에 대한 가르침을 분명하게 알아들었다.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요한 15,26)이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그런 까닭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의 본문은 단지 “또한 성부에게서 발하신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라고 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서로 다른 가르침이 전개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후에 동방의 그리스에서는 2차 니케아 공의회(787)가 “성부에게서 성자를 통하여(ex Patre per Filium) 발하신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라는 콘스탄티노플의 타라시우스 총대주교(Tarasius +806)의 신앙고백 형식을 받아들인다. 이는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보다 차이를 강조하는 양식인데, 이러한 배경에서 동방교회는 전체 교회적인 동의가 없는 필리오케의 첨가를 사랑과 일치에 반하는 죄로 여겼다. 서방에서 의미확대가 아니라 순수한 해설로 간주된 것이 동방에서는 신앙의 오류와 이단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다가 콘스탄티노플의 포시우스 총대주교(Photius +897)는 867년부터 일련의 저술을 통해서 라틴교회의 필리오케를 단죄하고, 성령은 오직 성부에게서만 발출한다는 가르침을 공식화하면서 필리오케 문구를 신경에서 삭제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마침내 1054년 이러한 동방교회를 상대로 “너희는 필리오케를 없애버렸다.”고 제기한 서방교회 흠베르트 추기경(Humbert +1061)의 고발은 (필리오케) 첨가에 대한 논쟁을 더 악화시켰고, 다른 문제들과 더불어 서로를 파문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다가 필리오케는 갈라진 동서방 재결합 공의회라고 할 두 교회의 일치협의에서, 곧 1274년의 2차 리옹 공의회와 1438/39년의 페라라 - 플로렌스 공의회에서 정식으로 인정되어, 이제 미사의 신앙고백에도 첨가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서방교회에서만 가능했으니, 동방교회는 단순히 승인만 하였지 사용은 거절한 것이다. 게다가 동방교회는 훗날 이 동의까지 철회하였고, 콘스탄티노플에서 1484년에 열린 시노드에서는 정식으로 페라라 - 플로렌스 공의회의 신앙고백을 배척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서방교회에 속하는 우리들은 오늘날 필리오케를 고백하고 있다. 즉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라고 신경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필리오케 논쟁의 배경과 역사 속에서의 전개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다음 호에서는 계속해서 ‘필리오케와 동·서양 교회의 성령이해’ 그리고 ‘성령망각의 간접적인 증거로서의 필리오케 논쟁?’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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