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꽝’하는 총소리를 방안에서 듣고, 귀가 멍멍해서 문지르고 있을 때 어머니의 숨소리가 보통 때와는 달리 코고는 소리처럼 들렸다. “엄마!”하고 불렀더니, 어머니께서는 말없이 나에게 쓰러지셨다. 어머니께서 막내 동생 ‘말다’를 안고 계셨었는데 내가 “말다야!”하고 불러도 아무 대답이 없어 더듬어 보니 말다 또한 어머니 품에 기대 쓰러져 있었다. 손에 끈적한 것이 느껴져서 ‘총에 맞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엄마!”하고 있는 대로 소리 지르면서 엄마를 안고 울기 시작했다.
골방문을 열고 총 든 중국사람들이 촛불을 들이대면서 사람이 죽은 것과 내가 우는 것을 보고 “빼이 쿠우, 빼이 쿠우(얘들아! 울지 마라, 울지 마라.)”라고 말하더니 큰방에 있던 물건들을 챙기고는 밖으로 나갔다.
집 앞에서 총소리가 크게 세 번 나자, 약탈자들이 여기저기에서 우리 집 앞으로 모여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바삐 말 있는 곳으로 뛰어가 말을 타고 사라져버렸다. 약탈자들이 떠나고 난 뒤, 동네 여기저기서 통곡소리,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사람들이 나와서 서로 안부를 묻고, 이름을 부르며 생사를 확인하는 등 동네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날 밤 사상자가 7∼8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 오셔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기에 “엄마, 총에 맞았어.”하고 할아버지한테 매달렸다. 할아버지께서는 앞집 작은집에 소리를 지르면서 “여기 에미가 총에 맞았단다! 여기 좀 오너라!”하고 소리를 계속 지르셨다. 여기저기에서 어른들이 모여들고 신부님까지 오셔서 엄마와 동생 말다의 시신을 큰방에 옮기고 사태를 수습하도록 하셨다. 모두들 같이 기도했고 “이 불행이 이 가정에서 더 큰 영광이 되도록 하느님, 도와주소서!”하고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음 날 동네 분들이 모여서 장례식을 거행했다. 이상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내 동생 벨라뎃다가 그 당시 상황을 나에게 이야기한 것들이다.
아버지는 하얼빈에서 밤늦게 해북진에 도착하여 아는 사람 집에 자러 갔더니 반가워하면서도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모를 정도로 부산하게 떠들며 하나도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애들이 해북진에 왔는데 형수 씨는 못 오시고 할아버지는 저쪽 집에 계시는데 거기 가시려는지….” 무슨 소리인지도 모를 소리를 계속 늘어놓았다. 아버지는 “이 사람아, 말을 어떻게 그렇게 하노?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좀 해라. 애들은 왜 여기 왔으며, 형수는 안 왔다니, 그게 무슨 말이고? 할아버지는 왜 저쪽 집에 계시냐?”고 했더니 그 사람이 울면서 “형님, 형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막내 조카도 죽었습니다.”하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후에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는데 우리 집과 친했던 동네아저씨가 횡설수설했던 이야기이다.
아버지께서 밤중에 선목촌에 가시겠다고 나서자, 모두 새벽에 일찍 같이 가자고 말려서 그 날 저녁에는 가지 못한 채 아이들을 만나 밤을 꼬박 세우고, 이튿날 일찍 선목촌 집에 가셨다고 한다. 집에 와 보니 창틀이란 창틀은 하나도 남지 않고 총에 맞아 다 부서졌다. 방에 들어가 보니, 방 안 역시 총에 맞아 벽도 성한 데 없이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고, 가구, 책상 할 것 없이 부서졌는데 성한 것이라고는 한쪽 벽에 십자가를 가운데 두고 양옆에 있던 성모성심 상본과 예수성심 상본, 두 액자만 유리 한 장 깨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 20여 명이 집중 사격을 했다니 성한 곳이 있을 리 없겠지.’하고 생각하시면서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하느님, 우리 집안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 저희를 당신 품에 거두어주시어 돌보아주십시오. 살아있는 아이들이 다 당신 곁에서 떠나지 않도록 잡아주시고 이 고통을 통해 우리 집안의 구원이 이루어지게 하소서.’하고 기도하셨다. 그리고 집안을 둘러보았더니, 그 어떤 것도 제자리에 있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것으로 보아 ‘어지간히 샅샅이 뒤졌구나.’하고 생각하시면서 집이야 어떻든 무덤으로 달려가셨다. 막내딸 말다와 나란히 묻힌 어머니의 무덤을 보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슬픔에 스스로를 가누지 못하고 두 무덤 가운데 앉아서 눈물을 한없이 흘리셨다고 한다. 이제 무엇을 더 해 줄꼬 생각하다가 사람을 사서 무덤에 뗏장을 더 덮고 나중에 찾아왔을 때, 무덤을 잘 찾을 수 있도록 앞에 놋그릇을 묻어두셨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엄한 아버지이셨지만, 퍽 가정적이셨다고 한다. 일제 때 살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모든 것이 배급제였고 넉넉한 것이라고는 공기와 물밖에 없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의식주(衣食住)를 충족시킬 것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져야 하는데 그 시대에는 그 어느 것도 넉넉하지 못했다. 지금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당시 귀했던 것이 쌀, 성냥, 석유, 식용유 등의 생필품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어머니께서 살림하시기에 넉넉할 정도로 이런 것들을 항상 구해주셨다고 큰 누님께서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는 하얼빈에서 피난민 열차표를 구했는데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사흘 후에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즉시 어머니께 가려고 하니 친척 할머니들도, 누님들도, “아버지께서 선목촌으로 가셨으니 잘 처리하실 텐데 네가 가서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또 어렵사리 구한 조선행 피난 열차표를 언제 또 구할 수 있겠느냐?” 하면서 그냥 조선으로 떠나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의 시신이라도 뵙고 싶고 “엄마!”하고 부르면서 다시 한번 품에 얼굴을 파묻고 싶었다. 죽은 막내 동생 말다도 안타깝게 생각되었고, 아직 어린 영자도, 경자도 엄마 잃은 슬픔이 오죽하겠나 싶어 불쌍하고 보고 싶었다. 또 복수 누님, 복자, 두 사촌도 얼마나 놀랐을까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식구 모두 조선에 같이 나가자고 하고 싶었다. 큰 누님께 아무리 울며 억지를 부려봐도 누님은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떠나야 할 시간이 되어 다 같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내일이면 만주에서 떠난다. 언제 또 올지 모르는 이곳에 그토록 사랑하던 엄마를 묻어두고 떠난다고 생각할수록 가슴이 저리고 미어지는 듯이 아팠다. 만주에 이사와서 10여 년 살면서 비록 고향은 아니었지만 행복하게 우리끼리 잘 살았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처해 만주를 떠나게 되었고, 이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겠지만, 삶이란 그리 평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열 다섯 나이, 내 인생에 이보다 더 큰 충격적인 일을 당할 수 있었겠는가! 남들에게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당시 나로서는 우리 어머니는 안 돌아가실 줄 알았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다고는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그것은 상상조차 한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결국 생각지도 못한 일이 닥치고 만 것이다. 이런 것이 인생인가! 어찌 슬프다는 말로 그 때 그 감정을 다 표현할 수 있을꼬. 그 감정을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죽을 때까지 어머니와 같이 있겠다는 마음만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 나 지금부터 항상 엄마하고 같이 있을게. 그리고 엄마가 나를 가졌을 때 요셉 성인과 약속하신 것, 내가 꼭 지킬게. 엄마가 그 약속 지키도록 천당에서 도와줘야 돼. 엄마, 사랑해.”하면서 어머니께서 주신 목걸이를 확인하고 정거장으로 향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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