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도 모르는 사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으로 사제가 됐다 하시는 김경식(보니파시오) 몬시뇰을 초록빛으로 물든 대구가톨릭대학교 캠퍼스에서 만났다.
대봉성당 보좌신부를 시작으로 지금의 모습까지 몬시뇰은 참으로 많은 일을 겪으며 걸어왔다. 1967년 사제서품을 받은 후 늘 삶과 죽음을 염두에 둔 김경식 몬시뇰은 “처음에는 첫 미사만이었지. 그러다 예수님께서 서른 셋까지 사셨으니까 나도 그때까지만 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다시 마흔까지, 쉰까지, 예순까지만 그렇게 1-2년이 지나 현재까지 와 있네.”라고 회고를 하신다.
병약했던 몬시뇰. 신학교 2학년 초, 4.19혁명으로 나라가 어수선할 무렵 폐병을 얻어 금오산에 들어가 홀로 주사를 놓으며 육체적인 고통과 싸우며 뒤쳐진 공부에 필사적으로 매달리셨던 몬시뇰은 “그 당시 신학교는 개학을 하면 시험을 봤네. 모든 과목을 라틴어로 수업을 받아야 했고, 아파서 학교에 가지 못한 나는 친구들의 노트를 빌어서 공부를 했지. 시험에서 낙제하면 바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정도로 아주 중요한 시험이었네. 수많은 학생들이 떨어져나가는데 이상하게 난 안 떨어지는거야. 이제와 생각해 보면 하느님께서 날 붙여준 거 같네.”라며 아련한 추억을 꺼내 보이신다.
본당사목과 특수사목을 거쳐 지난해 9월 대구가톨릭대학교 총장으로 부임하신 지 1년이 채 안됐지만, 대내외적인 행사에 참여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는 몬시뇰은 “하루의 일정이 빡빡하고 사회 사람을 많이 만나야 되며, 사회법에 따라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힘이 들 때도 있지만, 복음을 전하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은 어느 자리에 있든 다 마찬가지네.”라며 어느 곳에 있든 사제로서의 사명감을 잊지 않는다.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마저 침해 당하는 요즘, 몬시뇰은 대구가톨릭대학교 학생들은 학교 교훈처럼 서로 사랑하며 봉사할 줄 알고, 정직하게, 성실하게, 행복하게 사는 밝은 인격체가 되길 희망하신다.
사제관에서 사무실까지 걸어 출퇴근을 하며, 오며가며 만나는 학생들에게 먼저 인사하며 하루를 시작하셨던 몬시뇰. 건강상의 이유로 학생들과 접촉할 수 있었던 생활반경이 이젠 좁아졌지만, 언제나 학생들의 눈높이에서 도움이 되고자 하신다.
거센 비바람과 뼈를 깎는 고통이 찾아와도 오직 한 길로, 그 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걸어온 삶이기에 후회도 미련도 없다하시는 몬시뇰, 다만 현재의 삶과 앞으로의 삶에 충실할 뿐이다.
몬시뇰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콘크리트 틈새로 비집고 나온 이름모를 꽃의 생명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 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