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꿈꾸는 이상향, 이상적인 국가, 지상낙원 등을 표현할 때 흔히 ‘유토피아’란 단어를 많이 씁니다. 이 유토피아란 단어를 만들어 내신 분이 바로 토마스 모어 성인이십니다. 이상적인 국가상을 그린 명저이자 세계의 고전이 된 《유토피아》의 작가로 유명한 토마스 모어 성인께서는 영국 런던에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과 링컨 법학원을 나와 법조계로 진출하셨습니다. 한때 사제직에 관심을 갖고 수도회에서 지내기도 했으나 변호사와 하원의원을 거쳐 국왕 다음가는 고위직인 대법관까지 오르신 분이셨는데 요즘으로 치면 국회의장·대법원장·국무총리를 다 합친 최고의 권력입니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검소하게 사시면서 늘 약자 편에 서셨습니다. 공정한 변론과 빈곤 계층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으로 많은 이들의 신뢰와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특히 국왕 헨리 8세의 부당한 횡포에 저항하다 스스로 단두대에 올랐을 만큼 정의를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국왕 헨리 8세가 왕비와 이혼하고 왕비의 시녀와 결혼하려고 하자, 토마스 모어 성인께서는 교황청에 제출하는 왕비와의 이혼 허가서에 서명을 거부하고 교회의 가르침에 대립되는 왕의 명령에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헨리 8세가 1534년 ‘영국 교회의 유일한 수장은 국왕’이라는 수장령을 선포하여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독립하여 성공회를 세우자, 성인께서는 수장령 선서를 거부하고 대법관을 사임했습니다. 새 왕비의 책봉식에도 초대를 받았으나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한 처신이었지만 결국 헨리 8세의 분노를 사게 된 성인께서는 런던탑에 갇히게 되었고 1535년 반역죄의 죄목으로 참수형을 받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국왕 폐하의 충실한 종복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이전에 순종하는 주님의 종입니다.” 단두대에 올라서서 마지막까지 하느님의 정의를 위해서 권력에 굽히지 않는 신앙인이셨던 성인께서는 1935년 비오 11세 교황님에 의해 시성되셨으며, 법률가·정치인·공직자의 수호성인으로 받들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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