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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에 가다 - 정찬문(안토니오) 순교 복자를 찾아서
“배교한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끌고가지 않겠다.”는 유혹을 뿌리치고


박철수(보니파시오)|경산성당

 

지난 5월, 진주 문산성당의 주일학교 학생들과 일본 큐슈지방의 나가사키 성지 순례의 안내자로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 문산성당 강병모(파비아노) 신부님으로부터 성지 성당으로 지정된 문산성당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역사가 110년이나 된 성당이었다. 때마침 캄보디아에서 선교를 하다 휴가를 온 도미니카 수녀(그리스도교육수녀회 소속)와 수녀의 언니와 함께 문산성당을 찾아 나섰다. 성당 입구에 좁은 골목을 들어서니 깨끗하게 잘 보존된 옛 한옥의 모습이 보이고 그 뒤로 높다랗게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현대식 건물의 성당이 나타난다. 오른편 주차장과 왼편의 유치원이 자리하고 있으며 한옥 앞에 문산성당의 역사가 새겨져 있는 안내판이 보였다. 그 안내판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이곳은 1905년 소촌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된 진주 지역 최초의 성당으로 광복 이전까지 진주를 포함한 서부 경남 일대 천주교의 거점이었다. 기와 지붕으로 된 구 성당 건물과 서양식 성당 건물이 경내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구 성당은 정면 6칸, 우측면 4칸, 좌측면 3칸 규모로 동쪽에 출입구, 서쪽에 제단을 두고 내부 예배공간에 열주를 두어 신랑(身廊)과 측량(側廊)을 구별하였다. 신자가 늘어나 성당을 건립하면서 현재는 강당으로 쓰이고 있다. 서양식 성당은 장방형 평면이며 정면에 돌출된 높은 종탑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의 예배 공간이 구성되어 있다.>

입구 종탑에 드리워진 종을 치는 밧줄은 현재에도 종을 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성당 내부는 화려하지 않지만 제대 뒷면에 성화가 다른 성전에서 볼 수 없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운데로 좌우로 열두 사도가 그려져 있는데 전임 신부님께서 성당을 리모델링 할 때 마지막으로 사도가 된 마태오 사도가 예수님의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은 신부님의 주보성인을 그 자리에 그려 넣었다는 설명을 듣고 참 재미있는 작품이라 여겼다. 그리고 강 신부님께서 주신 자료를 보면 문산성당의 유산 세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첫째, 뿌리깊은 신앙유산으로 문산성당은 마산 완월성당(1900년 설립)에 이어 마산교구에서 두 번째로 오랜 역사를 가진 서부 경남지역 신앙의 요람이다. 1866년 병인박해 전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고 1905년 11월 소촌공소에서 소촌성당으로 승격되고 1913년 문산성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둘째, 자랑스런 문화유산이다. 1923년 건축된 옛 성당(기와 지붕의 한옥)과 1937년 건축된 고딕양식의 현재 성당은 우리나라 근·현대 성당 건축의 토착화 과정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근대 문화유산의 보존과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 5월 국가지정 등록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었다.

셋째, 아름다운 자연 유산이다. 3000여 평에 달하는 넓은 부지에 신·구 성당이 자리잡고 성당 주변에 심어 가꾼 나무들과 푸른 잔디정원, 자연석, 절구통, 맷돌, 항아리 등이 연출하는 조경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더욱 더 큰 유산은 병인박해 때 순교하신 지난해(2014. 8.16) 복자가 되신 정찬문(안토니오) 순교자의 묘소가 있다는 것이다. 문산성당 소속 사봉공소에 있는 사봉성지는 상당히 넓은 땅을 확보해 잘 가꾸어져 있다. 순교자의 묘는 1m 높이의 장방형으로 대리석이 감싸고 있으며 앞면에는 월계수가 그려져 있고 그 위에 ‘순교자 정 안토니오의 묘’라고 새겨져 있다. 복자 정찬문(안토니오)의 약전은 시복자료집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복자 정찬문(안토니오:1822~1867) - 경상도 진주 허유고개 중촌(현 경남 진주시 사봉면 중촌리)의 양반집에서 1822년에 태어난 정찬문 안토니오는 먼저 영세 입교한 아내로부터 뒤늦게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고, 그의 나이 40세 때인 1862년 교리를 배워 입교한다. 이후 3년 이상을 열심히 수계한다. 그러던 중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사방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그도 그 해 가을에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된다. 이때 일가 친척과 평소 알고 지내던 그 지방 하급관리가 와서 “배교한다는 말만 하면 끌려가지 않도록 하겠다.”고 유혹하였지만 그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다. 진주로 끌려간 정찬문 안토니오는 25일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종종 관장 앞으로 끌려나가 혹독한 형벌을 받는다. 어느날 안토니오는 다시 옥에서 끌려나와 무수히 매를 맞았으나 그는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는다. 그런 다음 다시 옥으로 끌려 들어간 뒤 그날 밤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이때가 1867년 1월 25일(음 1866. 12. 20)로 당시 그의 나이 45세였다.>

무두묘(無頭墓)로 불리기도 한 순교자의 묘는 1948년 3월 무촌리에 살던 광산 김씨 할머니의 제보를 받아 허유고개 길섶에 있던 순교자의 묘를 찾아냈다. 그해 5월 31일 순교자의 유해를 확인하고 그 앞에 기념비를 세웠다. 그 후 1975년 그 인근에 새로 조성될 사봉공소의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하였으며 1978년 묘소를 새로 단장하면서 순교비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지난해 복자가 되신 다음 순교자의 자료집을 정리하여 묘소입구에 이렇게 쓰여있다.(치명일기 830, 병인순교자 증언록 163번, 박순집 증언록 3권 31면, 하느님의 종 5권 371쪽)

<순교자 정찬문(안토니오)은 진주시 사봉면(寺奉面) 무촌리(武村里) 중촌(中村)에서 부친 정서곤(鄭瑞坤)과 모친 울산 김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순교자는 고려말 대사헌을 지낸 정온(鄭瑥)의 후손이었다. 정온은 조선이 건국되자 절개를 지키려 낙향했던 인물이다. 순교자는 대산면 가등공소 신자 칠원 윤씨(尹氏)와 혼인하였는데 부인의 권면으로 영세 입교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순교자는 신자인 것이 드러나 체포되었다. 놀란 문중(門中)에서는 천주교인이 아니니 다시 조사해 달라는 재심을 청원(고복,考覆)하는 한편 순교자를 회유하려 하였다. 양반으로서 자부심이 대단했던 정씨 집안에 나라에서 금하는 천주교인이 나타났으니 문중 박해는 가혹할 수밖에 없었다. 갖은 압박과 질책이 가해졌지만 순교자는 배교를 거부하였다. 다시 감옥에 갇힌(음 9월 20일) 순교자는 혹독한 심문을 거듭 받았다. 그동안 그의 가산은 적몰되고 가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아내 윤씨는 매일 주먹밥을 들여보내며 신앙을 지키도록 남편을 격려하였다. 거듭되는 문초에 매를 너무 많이 맞아 1867년 1월 25일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친척들이 시신을 요청하자 관아에서는 머리를 남겨두고 몸만 내어주었다. 순교자가 양반 가문이고 재심을 청구한 문제의 죄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하체(下體)만 장사 지냈고 이곳 사람들과 신자들에게 무두묘(無頭墓)로 알려지게 되었다. 오랫동안 안토니오 순교자가 참수치명(斬致致命)한 것으로 전해지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순교자의 무덤은 문산성당 7대 주임(1946~1948) 서정도(벨라도) 신부가 1947년 12월 9일 가을 판공성사 차 ‘굼실공소’에 갔을 때 공소회장 정 바오로에게 순교자 안토니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치명일기(1895)’의 기록을 토대로 순교자의 묘를 찾기 시작하였다. 1848년 3월 29일 서 신부는 본당 청년들을 데리고 엠마오 행사를 겸해 순교자 묘소 발굴에 나섰다. 순교자의 후손(종 증손)인 정경진(鄭景珍)의 증언을 토대로 무덤을 파 보았다.

무두묘(無頭墓)가 아니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 신부와 여러 교우들이 문산으로 귀가하고 차편이 없어 몇몇 청년들은 남게 되었다. 그때무촌리 중촌에서 나고 출가해 같은 마을에서 줄곧 살아온 당시 85세의 광산 김씨 텃골 할머니(1864년 8월 15일생, 무촌리 1024번지 거주)가 청년들에게 다가와 언짢아하며 “왜 엉뚱한 무덤을 팠을꼬! 찾은 무덤은 다른 곳에 있는데.” 하며 어릴 때부터 ‘서학(西學)하다 목 잘려 죽은 무덤’이라고 알고 있는 허유고개의 무덤을 알려 주었다. 교우들(청년들)이 무덤을 열었을 때 구덩이를 깊이 파지 않고 매장을 한 흔적이 완연하였다. 이 제보로 1948년 3월 29일 순교자의 무두묘(無頭墓)가 확인 되었다. 순교자의 묘소는 허유고개 비탈길가에 있었는데 아무도 무덤인 줄 모를 정도로 봉분(封墳)이 허물어져 있었다. 보고서를 받은 서 신부는 절차와 예(禮)를 갖추지 않고 순교자의 무덤을 파헤친 청년들의 성급한 행동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서 신부는 그해 5월 31일 교우들과 본당 수도자들, 순교자의 외인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덤을 다시 열고 유해를 새로 입관하였다. 그리고 중촌마을 학생들이 사봉초등학교로 가는 등굣길 섶에 있던 순교자의 묘소를 약간 위쪽으로 이장하였으며 본당에서 준비한 비석을 세웠다. 발굴 현장에 입회하고 목격한 증인들의 명단을 새겨 두었으며 그후, 진주 옥봉동성당 주임 정삼규(요한) 신부는 옥봉동, 칠암동, 문삼, 장재동, 사천성당을 중심으로 ‘정 안토니오 순교자 현양위원회’를 구성하고 이곳 부지 754평을 확보하여 1975년 10월 순교자를 현 위치에 모시고 잘 단장하였다.>

복자가 되신 정찬문 순교자. 비록 짧은 신앙생활이었지만 모진 고문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순교의 크나큰 은총을 받으신 것 같아 그 분의 신심을 본받고 살아 갈 수 있도록 전구를 청하며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복팔단(마태오 5,1-12)을 묵상해 본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은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려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 하여라,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하느님께서는 순교자들을 통하여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