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좀처럼 바깥에 나가지 않았다, 방안에서 졸고 있거나 무심하게 앉아있을 뿐. 그랬다, ‘무심(無心)’이란 말이 그에겐 늘 맘에 들었었다. 때로는 그림책 - 한땐 그런 서양화 미술서적을 구입하러 얼마나 애썼던가! - 을 펼쳐들고 노란 색깔에만 눈을 멈춘 듯이 보곤 했다. 그는 고흐를 너무 좋아했다. 고흐의 그림은 온통 노란색 일색이었지만, 그 친구의 자화상, 더욱이 그 자화상의 눈<眼>이 좋았다. 그는 고흐 매니아(mania)였던 것이다. 참, 요새 ‘매니아’는 좋은 의미의 매니아지 미친 것은 아니라고들 하는 모양이다.
그는 근래 이 겨우내 아무 데도 없없던 것과 다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잘 뵈이지 않았고, 남의 눈에 띄는 무슨 일을 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가 자주 자기는 “이 세상에 없다.”거나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고 외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게 세상 부정(否定)의 뜻인지, 겸양을 다한 세상과의 화해의 뜻인지 그 자신도 종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선지, 그는 모든 걸 제 혼자 생각하고 일했다. ‘일’이란 것도 그냥 하릴없이 방바닥에 앉아 있다가 입 속으로 무어라 지껄이거나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그건 밖으론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여기서 감히 주장컨대, 그가 ‘사는 방법’이 그러했을 뿐, 사람을 싫어한 적은 없었다. 그는 오히려 모든 사람을 좋아했다.)
사람을 너무 사랑하려다 사람들에게 늘 실망한 그는, 정말이지, 제가 하고픈 대로 - 사람을 보지 않고 그리워하는 그런 방식으로 - 사람을 사랑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에게 있어 최선이었다. 그로써 ‘사랑의 진실’을 사는 것이라 믿기까지 했다. 그런 삶이 그를 참 편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서 그는 조용히 사는 것이다. 왜, 그러면 안되는가? 그러면, ‘그’는 누구인가? 그는 곧 이 시대의 우리 자신들이지 않은가? 아니, ‘나’라면 어떨까? 나의 내면엔 언제나 또는 때때로 그저 ‘그냥’ 살고 싶어질 경우가 많다. 그게 ‘자유’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存>’이야말로 진정한 자유가 아닌가.[ 唯我 - 유일하고 하나뿐인 ‘나’- 의 唯는 ‘오직, 오로지’란 뜻이다! ] 이는 곧 그리스도교<가톨릭> 영성에서 개인 성소(個人聖召)에 따른 ‘자아(自我)의 고유성’을 가리킨다고도 하겠다. 이야말로 은총, 은사이기도 하다. 요즘엔 그게 없어졌다. 누구나 비슷하고 거의 똑같기만 하다. 그의 올해 모토가 “다른 이와 - 사상(事象)과 사물과 - 다르게 살자!”이다.
현대사회란 물불을 가리지 않는 듯이 급변하는 것일까. 그런 가운데 경제 제일주의와 이기적 분열주의가 득세하여 판을 친다 해도, ‘한 사람, 한사람’이 이 물질문명의 무도한 비인격화, 역가치화를 위해 무작정 희생되어선 안되리라 여겨진다. 오늘날 ‘정체불명’의 병리적 현상과 그것에 물들어 가는 세태가 ‘나’의 생(生)을 무시하고 무슨무슨 - 말도 안되는 - 유행과 꼭 같은 생각, 말, 행위를 요구한다. 그런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이랄까, 도무지 ‘나’란 있을 수 없게끔 한다.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내’가 여기 있을 수도, 있어도 안 된다는 것이!
그렇다, 그는, 아니, 우리 저마다는 제 감옥 속에 갇혀 살 뿐이다. 바깥 어디에도 안전하지 못하다. 예로써, 시집 장가가기도, 술먹기도, 옷치장도, 연애하기도, 노래하고 춤추기도 그외 모든 것도 대통령 - 모든 상사(上司)의 대표격(格) - 이나 탤런트 - 모든 우상의 대표격 - 와 같이 하거나 말거나 해야 하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조지 오엘이 「동물농장」을 쓴 게 언젠데 아직 이럭하고 있는가. 이제부터라도 서로가 달라도 아주 많이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새 천년대의 이른 아침 같은 시대, 지금은 그 벽두다. 이 사회 현실의 사람다운 인격(人格)을 저버리는 동물<숫격, 獸格>들이여! 가라. 이 나라 분단의 정치 이데올로기적인 동해의 철조망과 38선도 가라! 그리고 자유여! ‘그’와 ‘우리’ 모두에게 어서 오라! 이 가난하고 서러운 사람들의 새아침 새날을 일깨울 희망이여, 사랑과 평화와 자유여! 여기 와 우릴 껴안아, 꼭 껴안아 다오.
요즘 세사(世事)를 볼라치면 겨울도 그 한복판이 이미 다가온 양 살벌하기 그지 없다. 우리네 삶의, 사랑의 ‘가난함’이 이렇게 차가운 바람결에 마음 아프게 스치운다. 아직도 ‘너’를 향한 이 그리움이 남아, 아니 더욱 되살아나 차마 못 잊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건 겨우내 죽었다가 봄이면 다시 살아나는 나뭇잎새나 새순과도 같은 것일까.
이 화산(花山)의 가을과 겨울 사이, 저렇게 ‘무심, 무욕하게’ 모든 걸 다 비운 들판을 바라보면서, 나는 조금은 빛 밝은 마당의 뜨락 한켠에 가만히 앉아본다. 그리고 “그리움을 그리워해 본다.”
내 너를 그리워함은 / 아직은 이렇게 살아 있기 때문일까. //
내 너를 이제껏 그리워함은 /
이 이승의 산마루 너머로 /
날마다 해 지고 푸른 별이/
떠오르는 것과 /
그리고 또 아침이 다시 오는 것과 /
이 생애의 외로운 나그네 길 위에로 /
때때로 눈비가 내리는 것과 / 우주 이쪽의 오랜 세월, 그 바닷가에서 /
오늘도 갯바람 속 물결소리를 듣는 것과... //
내 너를 정녕 그리워함은 /
그 그리움으로 하여 /
아직도 이만큼 살아 있는 까닭에서다.
- “그리운 마음 1” 전문
이 그리운 마음 때문에 /
나는 이 세상에 살아 있네. /
이 그리움이 끝나면 - 그럴 수는 없겠지만, - /
나는 어느 청산(靑山)으로나 가리라. /
거기 북망(北邙)의 산기슭 무덤가에 서서 /
너를 향한 내 이 그리움의 주검을 / 말없이 홀로 바라보겠네.
- “그리운 마음 2”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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