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목촌 소학교에 들어가고부터는 미사 때 보미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미사 드리는 양상이 지금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신부가 제대를 향해서 미사를 바치고, 신자들은 신부의 등뒤에서 참례하였다. 그리고 보미사 하는 아이들은 미사 시작하기 전에 층계 밑에서 신부님과 입당송 기도를 올렸는데 그것이 전부 라틴어였다.
나는 매일 성당에 가서, 행여 여러분들이 교회 박물관에 갔을 때나 볼 수 있는 매우 두껍고 무거운 미사경본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가면서 미사복사를 섰다. 작은 나로서는 미사경본을 들다가 떨어뜨리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어쩔 줄을 몰라하며 행여나 야단맞지는 않을까, 행여나 책들이 부서지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 내가 넘어져서 아픈 것은 생각지도 않고 열심히 복사를 섰다. 미사가 끝난 다음에 제의방에 들어가면 가끔 신부님이 수고했다고 칭찬도 해 주시고, 넘어졌을 때에는 다치지는 않았느냐고 안쓰러워 하시기도 했다.
그때 신부님이 칭찬해 주시는 말씀이 너무 좋아서 손이 시려웠던 것도, 책이 무거웠던 것도, 넘어져서 아팠던 것도 전부 자랑스럽기만 했다. 지금도 내가 미사를 드린 다음, 복사 서는 아이들을 쓰다듬어 줄 때는 그 시절 생각이 나곤 한다. ‘그 아이들도 그 순간 행복을 느꼈을까?’하고.
이렇게 철이 들면서 매일 부모님과 함께 매일미사에 참례했다. 그러나 내 나이 7∼8세밖에 안 된 그때,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었겠는가! 아침에 미사참례 가자고 깨우면 일어나기 싫었고, 할 수만 있다면 안 갔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매일 미사참례는 부모님들의 일과였기 때문에 따라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나의 일과이기도 했다.
한번은 미사에 따라 나서다가 누나들 방에 다시 들어가서 또 자기 시작했다. 얼마를 자다가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보니, 벌써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때 나도 밥상에 앉으려 하니까 어머니께서 무서운 눈으로 앉지 못하게 하시며 야단을 치셨다. “오늘 미사에 참례하지 않았으니, 아침밥도 굶어라. 영혼이 밥을 안 먹었는데 육신인들 밥을 먹어 무엇하겠느냐? 미사 안 간 벌로, 우리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묵주의 기도를 해라.”고 말씀하셨다.
모두 큰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동안, 나는 마루에 꿇어앉아 울먹이면서 기도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너무하다 싶어 서럽고 야속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아무도 내게 밥을 먹으라고 권하지도 못했다. 어머니는 항상 단호한 분이셔서 누님들이 감히 어머니의 명을 거스르지 못했던 것이다. 아버지께서도 “이 놈, 미사참례도 안 하고…” 하시면서도 밥 먹으라는 말씀은 없었다.
11시나 되어서 어머니 앞에서 한 시간이나 다시 설교를 듣고 난 후, 어머니께서 특별히 마련해 주신 내가 좋아하는 반찬과 밥을 먹기 시작했다. 맛있게 먹고 있는데, 옆방에서 어머니가 누나들을 야단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내가 밥을 먹지 못하게 벌을 준 것은 미사에 빠지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 한 것이었는데, 너희들은 어린 동생이 밥을 안 먹고 굶고 있는 것을 보고도 몰래라도 밥을 가져다 줄 생각도 않느냐! 밥을 굶는데 애처롭지도 않았느냐!”고. 나 때문에 누나들이 야단맞는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독자 여러분도 여러분의 자녀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지 못하면 안쓰러워 깨우지도 못하듯이, 우리 어머니도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종교교육에 대해서는 철저하셨다.
저녁이면 우리 동네에서는 저녁 식사를 마칠 때쯤 성당 종을 쳤는데, 그때는 동네 사람들이 전부 성당에 모여 저녁기도를 같이 바쳤다. 저녁기도를 동네 사람들과 함께 바친 후, 자기 전에 한 가지 더 할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불을 깐 후, 어머니 앞에서 12단을 외우는 것이었다. 마지막까지 외운 다음에야 잘 수 있었다.
여름이면 여름대로 일어나기 싫었고, 겨울이면 겨울대로 따뜻한 온돌방에서 자다가 영하 30도라는 추위에 밖에 나간다는 것은 참말로 어려웠다. 여러분들은 영하 30도의 추위가 얼마나 혹독한지 아실는지 모르겠다. 겨울에는 주로 검정 옷을 입었기에 검정 옷을 입고 밖에 나가면 순간적으로 검은 옷이 흰옷이 되고 만다. 이유는 집안에서 습기를 먹은 옷이 밖에 나가자마자 얼음으로 뒤덮이기 때문이다. 성당 역시 지금과 같이 난방이 된 것도 아니고, 추위는 밖이나 안이나 한가지였기에 방석을 들고 가서 깔고 앉았다. 성당과의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두꺼운 옷을 입고 또 방석을 겨드랑이에 끼고 걸어가면 두 발자국도 못 가서 방석이 떨어진다. 몇 번을 다시 줍고 일어나고 했지만, 얼음 빙판인 길에서 수시로 넘어졌다.
성당에 도착하여 제의방에 가서 신부님께서 제의를 입으실 때 도와드리고, 제대에 촛불을 켜고 복사를 서기 시작했다. 물론 그때 복사를 설 수 있는 동네의 다른 아이들도 있었지만, 겨울 추위에 평일미사에 참여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당시 신자들은 제대를 좌우해서 오른쪽에는 남 교우, 왼쪽에는 여 교우들이 앉았는데, 새벽미사에 참석한 교우들이라고는 남자 쪽에는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밖에 안 계시고, 여자 쪽에는 어머니와 큰 누님들 두서너 분이 있을 뿐이었다.
겨울이 되면 제대 위에 화로를 올려 놓고 미사를 지냈다. 팔을 벌리고 집전하시는 신부님은 얼마나 추우셨을까! 주수병이 얼어 터지고, 성작 잔을 쥔 손끝은 시리다 못해 아리다고 하셨다. 성혈을 영하실 때는 입술이 성작에 붙어버리기 때문에 미리 ‘호호’하고 입김으로 녹이는 것을 보았다. ‘신부님이 고생하시는구나.’하고 어린 마음에도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아프지 않으면 매일미사를 참례하고 복사를 섰다. 수시로 어머니한테서 교리를 배웠고, 매일같이 문답을 몇 조목씩 외워야 했다.
매주 토요일에는 성당에 가서 고백성사를 보고 성가연습을 했다. 그 시절 성탄, 부활, 성모 승천 대축일 같은 때에는 성극 연습과 성가 연습 때문에 종일 성당에서 살다시피 했다. 추울 때는 집밖에 나가지 못하고 종일 안방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여동생을 데리고 ‘미사놀이’를 했다. 제의대신 큰 이불보를 꺼내서 어깨에 두르고, 라틴어를 모르니까 그저 들은 대로 ‘세꼴라, 세꼴라… 아멘.’(Saecula, Saeculorum. Amen. ‘영원무궁토록 아멘’이라는 말로 라틴어 기도 끝부분에 나오는 말)이라고 말하곤 했다.
이렇듯 나의 어린 시절은 성당밖에 모르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부터 부모님들께서 나에게 신앙의 선생님이 되어주시지 않았던들, 오늘날의 내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나의 성장기에 또 다른 사건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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