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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릉재(小陵齋) 화산통신(4)
화산(花山), 겨울 이야기


이정우(알베르토)|신부, 화산공소

화산의 겨울, 정월과 2월엔 별무리가 더욱 찬란하다. 밤하늘에 보석처럼 총총히 박혀 빛나는 무수한 별들의 잔칫상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 마치도 눈동자와 가슴팍과 발등 쪽으로 마구 쏟아져 내리는 듯하다. 그걸 안고 나는 마당 가운데 서서 밤잠을 잊을 때가 있다. 한참 그 별들을 쳐다보면서 그만 이대로 죽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내일 아침에 올 새 날의 ‘희망과 열망’을 맘으로 꿈꾸고 그리며 “다시 살아야겠노라.”는 삶의 다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서 나는, 이 혼란한 물질문명 시대에 드맑은 정신문화가 - 또 영성생활도 - 저 별빛 같이 찬연히 빛나고 피어오르길 한없이 기원한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은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일 뿐이니까. 올해 안식년(安息年)에 내가 거듭 스스로에게 타이르고 가슴에 새기는 뜻이 그러하다.

겨울 삼동(三冬)의 빨리 지는 해를 배웅하자마자 어둠이 사위에 깔린다. 나는 방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간다. 하루도 아닌 한 주간과 몇 며칠을 혼자 지냈으니 가깝증이 난 것일까. 그게 무슨 외로움이라면, 이 동안거(冬安居)는 무어란 말인가.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을 양이면 “나는 지금 여기 있다.”는 생각밖에 더 나질 않는다. 그래, 이렇게 그냥 살아 있는 거야, 고마웁게도! 아아, 이때쯤 별들이 뜨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뒷짐을 진 채 운동장만한 마당을 서너 바퀴 걷고 돌아본다. 다리가 좀 아플 즈음에야 멈춰서는 데가 이제부터 나의 무대가 되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잘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노래던가. 나는 이제 노래를, 그것도 내가 쓴 시편(詩篇)을 외고, 내가 아는 괜찮은 노랠 다 부른다. 사방의 어두운 산야(山野)와 밤하늘과 별무리와 나의 마음이 청중이다. 그 외엔 보고 들을 이도 없는 것이다. 하늘이 나에게 주신 것을 나는 사람들보다 하늘과 자연에게 먼저 내어드린다. 아직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1

이 산촌의 밤하늘엔 / 별이 하도 유난히 총총해서 /

그걸 쳐다보며, 나는 죽고만 싶었다.

2

저 산바람, 높새바람 소리가 / 이 들판의 하늬바람 자리로 내려온다. /

너를 보낸 뒤 또 밤이 오는가보다.

3

술 한 잔마다 차<茶> 한 잔씩 / 긴 밤을 꼬박 앉아 새우느니, /

산마을에 새벽녘이 차마 빨리도 오네.

4

안경 뒤에 숨었다고 저 산(山)에게 / 네가 뭐 안 보이는 줄 아느냐. /

숨어 숨어도 눈썹이 보이는 이 세상 땅인걸.

5

이제 우리에겐 더 이상 / 아무 것도 없고 - 없어졌고 -, /

오로지 희망만이 남았다, 안 그런가. - <화산시편-三行詩> 전문

 

눈이 오는 날엔 - 더욱이 오후엔 - 할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들녘을 가리며 아무 말도 없이 물어보지도 않고 내려오는 흰 눈발을 바라보는 그게 할일이다. 비가 올 땐 그 비가 늘 나한테 미리 물어보거나 무슨 독경소리를 내면서 오곤 했다. 눈은 그렇지 않다. 어쨌든, 이렇게 눈 오는 날엔 창문을 열고 한나절을 그렇게 창가에 서 있게도 된다. 오디오에 비발디의 ‘사계, 겨울 2악장’을 얹어 놓는다. 그 다음엔 앙드레 가뇽의 ‘머나먼 추억’이나 안나비사의 ‘전설 같은 사랑’ 또는 플라시도 도밍고/시셀 시세부/샤를 아즈나부르가 함께 부르는 ‘렛 이츠 스노우(Let It Snow)’라도 틀어놓고 있노라면, 이 곤고한 삶의, 불여의(不如意)한 한(恨)의 시름도 피곤도 다 잊고 만다. 저쪽 산너머 불의(不義)에 찬 바깥세상엔 무슨 일이 또 일어났을까, 오욕의 도시에선 무슨 욕심들이 서로를 못살게 굴고 있을까, 라는 생각이 평소 나의 뇌리를 어지럽게 하곤 했었지.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 이렇게 조금씩 눈이 쌓이는 산마루와 들판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나는 참 무념무상의 경계에, 무심(無心)의 세계에 와 있는 듯하다.

 

그런데 어디선가 기차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묵고 있는 화산공소(花山公所)의 탱자나무 울타리 뒤에서 이윽고 기적이 한두 번 길게 울린다. 기차에겐 화산 간이역이 가까워진 것이다. 그걸 알리고 누굴 내리고 태울 참이겠지. 아무도 타고 내릴 사람이 없을지도 몰라, 라고 나는 쓸 데 없는 말을 혼자 해 본다. 이처럼 눈 오는 날, 수년 전 언젠가 나는 울타리 너머 기적소리를 듣고는 곧장 카메라를 들고 뛰쳐나간 적이 있다. 그날 선로 위에서 눈을 맞으며 달리는 기차를 몇몇 컷 찍었었다. 그걸 현상해서 인화한 사진을 나는 심심할 때 더러 보곤 했다. 오마 샤리프 주인공의 <닥터 지바고> 영화 장면을 떠올리며, 유리 지바고의 여인 ‘라라’도 그려보면서 말이다.

 

기차가 멀리 가버리고, 눈은 더 많이 오다가 이젠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다. 차츰 어두워져오는 대지, 산그늘, 하늘녘을 나는 너무 좋아한다. 아니, 내 세상이 온듯 의기양양해지기도 한다. 밤이 와서 뭐 득 될 게 있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서서히 평안해지기 때문이다. 화산의 겨울밤은 나의 생애 가운데 가장 평화로운 그 ‘무엇’이다. 밤 늦게는, 혼자 차<茶>를 끓이고, - 사람이 많거나 산만하면 찻일이 번거로워진다. - 때론 약술도 한 잔 한다. 그런 게 악한 일도 착한 일도 아니기에 더욱 마음이 편한 것이다.

 

이제 이 글을 접고, 안식년의 겨울 이야기를 아래와 같은 시(詩)글로 마무리할까 보다.

 

이제는 길이 보인다. / 길을 갈 때 보이지 않던 길이 / 멈춰 서 있을 때

더 잘 보이는 것이다. // 길이 아닌 걸 길이라고 걸어가던 어젯날보다 /

길이 없노라고 그냥 머물러 앉아있는 오늘, / 오호라, 길이 더 잘 보인다. //

그대가 쉴 때마다 / 새로 시작되는 또 다른 / 삶의 길.

-<길 1-삶> 전문,『사람의 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