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주에 살던 그 당시만 하더라도 치안유지가 잘 되지 않아서인지 수시로 마적대가 들어온다는 말도 있고, 때로는 독립군이 지나가다가 동네에 들어오기도 한다고 들었다. 독립군이 뭔지, 그저 마적대와 별다름 없는 사람들이 총을 들고 들어와서는 물건을 빼앗는다고만 들었다. 아마 그때 만주에서 살았던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김일성이 독립군을 이끌고, 일본과 싸운다는 말도 들었다. 또 다른 조선 독립군도 일본군과 싸워서 큰 전과를 얻었다는 말도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조선사람이 사는 우리 동네에도 수시로 일본군들이 몇 명씩 왔다 가곤 했다.
나이가 차차 들어감에 따라 조선이 일본의 속국이 되어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어진 것도 알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독립운동을 하는 외삼촌이 존경스럽게 생각되었다. 소학교에서는 한글과 일본어독본, 산수, 지리, 국사(국사란 조선역사가 아니고 일본의 역사를 그렇게 불렀다), 중국어 등을 배웠다. 그 중국 촌구석에서도 3∼4년을 배우니 제법 일본말도 하게 되었다.
5학년이 되어서 작은 외삼촌네가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집안의 아이들을 서울에서 공부시키기 위해 누군가 한가족이 한국으로 나가야겠다는 친척들과 부모님들의 상의 결과, 작은 외삼촌이 선정되었던 것이다. 그때 나도 서울로 갔고, 천주교에서 경영하는 명동의 ‘계성 소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내 나이는 열한살, 처음으로 집을 떠난 내 모양이 마치 둥지를 떠난 새끼새가 어미품을 벗어나 오돌오돌 떨고 있는 신세와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실로 어머니의 품은 아이들에게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 생존의 ‘모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천 리 만 리 집 떠난 내가 항상 어머니 품만 그리워할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산간벽지인 한티, 산과 바위와 무성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곳에서 태어나 산도, 바위도, 나무도 없는 허허벌판 만주에서 몇 년 살다가 또 다른 화려한 대도시 서울, 집과 자동차와 사람들이 북적대는 요란스럽고 휘황찬란한 곳에서 살게 되니, 처음 보는 서울이라는 대도시는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그 속에서도 또래들과 같이 시간을 지내다 보니, 서울 생활도 날로 익숙해져 갔다. 서울 아이들은 듣기보다 친숙하게 나를 대해 주었다. 다만 경상도 사투리를 웃으면서 흉내내는 것 빼고는.
내가 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실감나게 했을 때, 서울 아이들로서는 신기하기만 했을 것이다. 영하 30도의 추운 날씨와 9월부터 내리는 눈이 3월까지도 녹지 않는다는 이야기, 노루나 토끼가 눈에 갇혀 허우적대는 것을 잡기도 했다는 이야기, 집 앞마당까지 꿩이 와서 모이를 구한다는 이야기 등은 서울 아이들로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같은 이야기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럭저럭 나는 서울 아이들과도 친해졌고 서울말에 익숙해졌다. 아마 나는 말 배우는 재주가 있었던 것인지 일본말이나 중국말은 물론, 경상도말을 쓰다가 서울말을 배우는 것도 과히 힘들지 않았다. 이렇게 몇 개월을 지내다 보니 여름 방학이 되었다.
방학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두 달 전부터 달력을 책상 위에 놓고 방학 시작하는 날을 기준으로 해서 거꾸로 번호를 매기기 시작했다. 하루가 지나면 다음 날은 하루가 줄어드는 셈이다. 그렇게 기다리던 방학을 며칠 앞두고 갑자기 학교에서 공지를 했다. 만주에서 온 학생들은 7월 20일 전에 만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20일 후면 일본군이 만주로 대이동을 하기 때문에 모든 차량을 민간인이 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보통 7월 23일 경에 방학을 했었다는데, 담임선생님은 특별히 나와 만주에서 같이 온 내 친구 조용주에게 17일 경 만주로 떠나라고 하셨다.
그때 만주 가는 특급 열차는 부산을 떠나 서울, 평양, 신의주를 거쳐 봉천, 신경(지금의 장춘)까지 가고 거기에서 갈아타고 하얼빈까지 가서 다시 지선으로 갈아타고 또 4∼5시간을 가서야 해북진에 도착한다.
서울에서 17일 아침 9시 30분에 차를 타니, 도저히 발도 들여놓지 못할 만큼 여행객이 많았다. 가방을 들고 겨우 어른들 틈사이에 끼어서 둘이 기차를 타기는 했는데 앉을 자리도, 설 자리도 없는 콩나물 시루같은 기차였다. 종일 가다가 지금은 북한 땅이 된 ‘신막역’에 도착하였다. 신막역은 모든 기차(석탄을 때는 증기 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는 곳이기 때문에 10분간 정차하였다. 그 시간을 이용해서 사람들은 도시락도 사 먹고, 불편했던 자리도 옮기고 하였다. 그때 비로소 손에 쥐고 있던 가방을 어른들에게 부탁하여 선반에 올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벤또’(나무를 얇게 깎아서 밥을 담은 도시락)를 사 먹었다. 다시 기차는 출발하였고, 옆에 앉아 있던 일본부인이 “보야(어린이를 부르는 일본말), 어디까지 가는데?”하고 물으면서 누구와 같이 가느냐고 안쓰러이 묻고는, 앉을 자리가 없냐고 하면서 잠깐이나마 자기 자리에 앉으라고 비켜주었다. 종일 서 있던 참이라 앉자마자 곯아떨어졌다.
날이 어두워서야 깨어보니 부인은 아직 내 옆에 서 있지 않은가! 미안하다면서 내가 일어나서 부인에게 다시 자리를 권하고 그때사 친구가 어디 있는지 찾았다. 그리고 도착한 역이 신의주라는 것을 알았다. 신의주는 조선의 마지막 역이고, 압록강 철교와 안동(지금의 단동)으로 이어지는 역이었다. 차안에 서서 가던 사람들이 신의주역에서 전부 내리자, 일본헌병들이 신분증과 짐 조사를 하였다. 국경을 지날 때는 나름대로 조사가 있긴 하지만, 특히 조선과 만주 사이에는 독립군이 왕래하는 길목이어서 조사가 더욱 심했다.
압록강을 지나고 만주에 들어서면서 밤이 되었고, 밤새도록 봉천(지금의 심양)을 거쳐 다음날 오전이 되어서야 신경에 도착했다. 그런데 신경에서 하얼빈 가는 차에서 문제가 생겼다. 시골 작은 역에 차가 정차하자 내렸다가 기차가 즉시 떠난다기에 얼른 올라탔는데, 그대로 자리에 가 앉지 않고 기차 승강구에 매달려서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본 독일영화 내용 중에 군인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묘기하는 생각이 나서, 나도 승강구 손잡이를 쥐고 한 발만 딛고 한 팔은 벌린 채 기차 뒷 방향을 보면서 묘기를 부린답시고 있다가 갑자기 ‘쾅’하고 머리 뒷부분을 어딘가에 부딪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철로와 철로 사이에 있는 신호기 철탑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뭐가 뭔지, 어떻게 된 일인지도 모른 채 나는 기차에서 떨어졌고, 기차는 그냥 가버렸다.
생각해보니, 서울에서 7월 17일 아침 9시 30분에 차를 타고 오후 내내 서서 신의주에 도착하여 조사를 받고, 밤을 세워 그 이튿날(18일) 오전 신경에 도착한 것이다. 신경에서 하얼빈으로 가다가 오후에 이름도 모를 작은 역에서 떨어졌을 때까지 만 하루 반이 지났다. 그리고….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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