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톨릭교회에서 대부분의 대축일은 주일과 겹쳐진다. 그러나 예수 성탄 대축일은 다른 축일들과 달리 주일이 아닐 때가 많다. 지난 예수 성탄 대축일은 마침 주일과 겹쳐졌지만 보통 성탄절은 12월 25일이라고 정해져 있기에 평일일 때가 더 많다.
중국에서 북경 한인천주교회를 사목할 때 첫 예수 성탄 대축일을 맞았는데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해 성탄절은 평일이었는데, 처음에 동교민항성당을 빌릴 때 주일에만 미사를 지내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대축일이라 해도 동교민항성당에서 미사를 지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예수 부활 대축일이나 예수 승천 대축일, 성령 강림 대축일은 다행히도 주일이라 미사를 지내는 데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보고 빌려야 했다.
우리가 빌린 곳은 외국인이 경영하는 켄핀스키(Kenpinski) 호텔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중국에서 외국인이 경영하는 호텔은 그 곳 하나밖에 없었다. 켄핀스키 호텔은 독일 루프트한자(Lufthansa) 항공회사와 우리나라의 대우그룹이 합작으로 설립한 호텔로, 대우그룹 양승남 이사와 김동성 씨가 근무하고 있었기에 저렴한 가격으로 쉽게 연회장을 빌릴 수 있었다.
북경에 있는 호텔이긴 하지만 외국인이 경영하는 호텔은 그 나라 소속인 것처럼 간주하여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중국 정부에서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천주교 한인공동체가 그곳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단, 초저녁부터 중국 공안(경찰)들이 지켜 서서 중국인들의 출입을 감시하였다.
이 때문에 중국 국적을 가진 조선족 동포들의 출입이 어려웠다. 그래도 항상 성탄 미사 때면 조선족 동포 신자 몇 명은 반드시 참석하였다. 한국 교포처럼 옷차림을 하는 등 변장을 하고 한국 교우와 짝지어서 들어왔기 때문에 중국 공안들도 알지 못했다. 조선족 신자들이 그렇게 변장을 하는 이유는, 생김새는 우리와 같지만 못사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옷차림이나 행색이 교포들과는 많이 달랐다. 미사가 시작되면 공안들은 부동자세로 제대를 주시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당시 북경에는 내가 보기에 희한한 일이 하나 있었다. 유명한 북경대학교와 청와대학교는 물론 다른 대학에서도 주요과목 시험을 12월 25일 성탄절에 치르는 것이다. 그래서 그 때가 되면 신자 학생들은 미리 “신부님, 성탄 때 미사 못 가겠습니다. 왜냐하면 24일부터 25일 밤늦게까지 전공과목 시험이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차츰 세월이 흐르면서 성탄절에 보던 시험이 미뤄지거나 당겨지면서 이곳저곳에는 사람이 차차 많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어떤 성당에서는 성탄절에 중국 학생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긴 의자가 내려앉는 사고도 있었다.
유럽에서는 11월만 되면 거리의 상점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고 크리스마스 장식이 도시를 위시해서 집집마다 요란하게 꾸며진 것을 볼 수 있지만, 중국에서는 전혀 그런 양상을 볼 수 없었다. 다만 각 성당마다 겉은 꾸미지 않고 성당 안만 꾸미는 데가 더러 생기기 시작하였다. 내가 북경에 있을 당시에는 그랬는데 요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는 도시도 있다고 한다.
여하튼 성탄절이 되면 빌리기는 하였지만 호텔 연회장에서의 대축일 미사, 아기 예수님 봉헌식, 장기자랑 시간 등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춤도 추며 참말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한국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성탄절을 보낸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참 흐뭇한 생각이 든다.
사실 중국에서는 아름다운 곳도 많기 때문에 가볼 곳도 많고 거기에 대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많지만, 그것보다 교회와 관련된 시골 마을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북경에서는 약 150Km 떨어진 곳에 성당촌(聖堂村)이라는 곳이 있다. 오래 전부터 신자들만 사는 곳으로 중국이 공산화 되었을 무렵에는 많은 박해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마을 신자들은 열심하기 그지없고, 신부가 없어도 매 주일 성당에서 공소예절을 하고 있다고 한다. 또 북경 시내에 있는 왕푸진(王府井)성당은 동당(東堂)이라고도 불리어지는데 오래되기도 했지만 참말 아름다운 성당이다. 정부에서는 이 성당을 본래 모습대로 가꾸는 한편 정원도 아름답게 꾸며놓고 관광객이 늘자 관람료를 받고 있다. 이 왕푸진성당이 북경의 한 명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또 예수회 마테오리치 신부가 들어와 지은 신학교는 지금 공산당 당사의 일부로 쓰이고 있어 후원에 아무나 들어갈 수는 없지만, 허가를 맡고 들어가면 마테오리치 신부를 비롯한 예수회 다른 신부들의 무덤도 볼 수 있다. 이런 것을 보면 하느님은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고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기회를 주시는가 보다.
한번은 중국을 방문하신 김수환 추기경님과 연길(延吉)에 갔을 때 어떤 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마침 신자들이 소식을 듣고 몰려와 창문을 통해서라도 추기경님의 모습을 보려고 서성이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 공안은 신자들이 모인 것을 보더니 식당 문이라는 문은 다 닫아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볼 일이 있는 척하고 밖으로 슬그머니 나가서 공안들에게 문을 조금이라도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먼 곳까지 추기경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신자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식사를 마치고 추기경님을 모시고 백두산에 갔는데 역시나 중국 공안들이 우리 차 앞뒤로 따라 붙었다. 드디어 백두산 정상에 도착! 그러나 안타깝게도 구름이 너무 많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백두산 천지는커녕 풀 한 포기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구름이 꽉 들어차 있었다. 천지 보는 것을 포기하고 내려오는 길에 장백폭포에 들러 잠시 구경하는데 추기경님은 “천지에서 내려온 이 물에 손이라도 씻자.”며 웃으셨다.
신경(지금의 장춘,長春)에 들러서는 중국 마지막 황제 푸이(傳儀)가 일본 사람들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만주국(滿洲國)이라는 일본 괴뢰정권의 수괴 노릇을 할 때 살던 왕궁에 가보았다. 정말 인상적이었는데 북경에 있는 자금성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하였다. 황제라도 권력을 잃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우리도 나이가 들고 몸이 아프면, 젊었을 때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기억해내고 또 생각하며 인생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후회할 때도 많다. 특히 요즘 몸이 아파서 누워 지내는 날들이 많은데, 지난 일들이 떠오르면서 후회되는 일들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니다. -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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