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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몬시뇰의 세상이야기
물따라 세월따라(6)


김영환(베네딕도) 몬시뇰

정신을 차려보니 기차는 이미 저 멀리 떠나버리고 사방을 둘러보다가 역사 쪽으로 울면서 걸어갔다. 목덜미가 따뜻하기에 손을 대어보니 피가 흥건히 흘러내리고 있었고, ‘머리가 깨져서 바람이 들어가면 죽는다.’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나서 두 손으로 뒷꼭지를 꽉 눌렀다. 역사 쪽에서 역원 둘이 뛰어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며 역장실로 데려갔는데, 그때 그들이 하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이 아이가 떨어진 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다. 자기가 까불다가 떨어졌지!”하고 저희끼리 수군거리던 것이, 행여 자기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하는 투다.

나는 피 묻은 손을 닦고 역장이 보자는 증명서를 내보였는데, 학생증과 기차표였다. 그때 역장이 구경꾼들에게 “이 조그만 아이가 어떻게 경성에서 해북진까지 혼자 가느냐?”고 감탄하면서 나에게 몇 살이냐고 물었다. 열한 살이라고 일본말로 답했다. 그러나 역장과 구경꾼들 중 일본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중국말로 다시 말했다. 역장이 갑자기 전화가 왔다고 하기에 받아보니, 친구가 이미 하얼빈에 도착해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내가 떨어진 역에 전화를 하게 된 것이었다. 하얼빈에서 해북진으로 가기 위해서는 다시 차를 갈아타야 하는데, 친구는 내가 도착할 때까지 하얼빈에서 기다리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 이젠 되었구나.’하는 순간, 긴장이 풀렸는지 온몸 군데군데가 아프기 시작했다. 기차에서 자갈밭으로 떨어지면서 깨진 무릎에서도 피가 흘렀고, 어깨와 등에도 여기저기 상처가 생겼고 손바닥도 찢어지고 발목도 부어 올랐다. 만신창이가 된 나는 앉아 있기도 어려웠고 엄마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만주에 처음 갔을 때 이런 일도 있었다. 중국집은 대문을 열자마자 바로 부엌이다. 부엌에서 동서로 문이 또 있고 그 문을 열면 토간을 가운데 두고 남북으로 두 방이 있다. 남북의 방들은 툇마루같은 좁은 마루를 건너서 서로 왕래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하루 밤은 호롱불이 꺼져 방이 캄캄해졌다. 그때가 설 명절이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우왕좌왕 성냥을 찾고 있었을 때 나는 남쪽방에 있었는데, 북쪽방에 성냥이 있는 것을 기억하고는 찾으러 갔다. 툇마루같은 좁은 마루를 지나다가 발을 헛디뎌서 토간에 떨어지며 얼굴을 북쪽방 벽에 부딪혔다. 내가 “악!”하고 소리를 지르며 ‘쿠당’ 소리가 나니까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영환이가 넘어졌다…. 영환이가 떨어졌다…. 아이구, 영환아!”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어머니께서 찾아더듬어 나를 껴안으며 “아이구, 이놈아! 야가 안 죽었나?”하며 피가 흐르는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 북새통에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엄마, 엄마! 나 안 죽었어.”하고 엄마 손을 잡았다.

 

그때 나는 어머니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아프면서도 엄마 가슴에 파고들어 “엄마, 나 안 죽었어.”하고 다시 한번 말하며 ‘내가 죽으면 이렇게 슬퍼하시겠구나.’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후에 동네 어머니들은 “그렇게 아프면서도 엄마한테 안 죽었다고 일부러 말하다니!”하며 대견스러워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역원이 밥이라고 갖다 주는데 냄비째로 들고 왔다. 반찬이라고는 대파 다섯 개, 어른 손가락만한 굵기였다. 그리고 된장 한 주발. 머리가 아파서 먹지도 못하고 긴 의자에 누우면서 “차가 언제 와요?”하고 물으니 내일 새벽 네 시에 있다고 했다. 머리는 지끈지끈 아프고 모기는 수없이 많이 달려들었다. 모기를 후치면서도 혹시나 잘못되어서 영영 집에 못 가지나 않을는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나는 지금 어떻게 되는가, 여기서 죽는 것은 아닐까, 머리는 괜찮을까, 과연 내가 집에 갈 수 있을까, 행여 이 사람들이 나를 팔아먹지는 않을까, 그래서 외딴 곳으로 팔려 가서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돼지몰이나 되지 않을까….’

 

그러다가 엄마 생각, 아버지 생각, 누나, 동생, 동네 친구들, 서울에서 사귄 동무 생각이 나서 계속 불안하기만 하고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항상 말씀하시던 ‘어떠한 경우라도 하느님을 믿고 성모 어머니께 기도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것만 믿고 호주머니에 있는 묵주를 꼭 쥔 채 ‘성모님, 도와 주세요. 돼지몰이 안 되고 집에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라고 수없이 성모님을 부르다가 잠이 들었는지 역원이 깨우기에 일어나 기차를 탔다.

 

여름이었지만 새벽녘은 추웠다. 더구나 머리가 아프고 몸을 다쳐서 그런지 으실으실 춥기만 했다. 차안에 들어가니 희미한 불 밑에 의자는 물론 바닥까지 사람들이 누워 자고 있었다. 중국 고유의 케케한 냄새가 역겨웠다. 발을 들여놓을 공간도 없는 곳에 겨우 의자에 기대어 서 있으니 기차는 ‘덜커덕’하고 달려갔다. 그럭저럭 몇 시간을 가서 하얼빈 역에 도착했다.

 

하얼빈에서 친구가 기다린다는 장소에 가 보니 친구가 없었다. 행여나 싶어 여기저기 찾아다녔지만 영 보이지 않았다. 시간표를 보니 이미 오전 9시에 해북진으로 떠난 차가 있었는데, 아마 그 차로 떠나지 않았나 싶어 계속해서 시간표를 보니 오후 1시경에 또 기차가 있었다. 그때까지 시간이 남았기에 쓸데없이 역구내를 왔다갔다 서성이다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쏘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 장소에 혼자 찾아가 보았더니 과연 화강석으로 만든 석대 위에 이토 히로부미 흉상이 있고, 거기에는 몇 년 몇 월 몇 일, 이토 히로부미가 어떤 괴한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이 일본말로 기록되어 있었다.

 

기차를 기다리면서 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생각했다. “사람이 어디에 가든지 자기 거취를 확실히 해라. 어려울 때라도 당황하지 말고 차분하게 생각해라. 그리고 주 예수, 마리아께 기도해라. 죽을 위험이 닥치더라도 묵주 기도를 해라.” 묵주를 또다시 쥐고 어머니 생각, 성모님 생각을 하며 열심히 기도하였다.

 

시간이 되어 기차를 타고 해북진으로 향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집에 가는구나, 어머니를 만나는구나!’ 아버지의 걱정스런 얼굴이 떠올랐고, 동생들, 누님들이 생각났다. ‘선목촌 나의 친구들, 동네 어른들도 만나는구나.’하고 머리는 아팠지만 마음은 한없이 기뻤다. 어제 제대로 자지 못한 탓도 있고 고단한 데다 마음이 놓이니 곧 잠이 들었다.

 

꿈에 누군가가 “영환아, 영환아!”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잠을 깨니 벌써 해북진에 도착해 역원이 호각을 불고 사람들이 내리고 있었다. 차창 너머로 손을 흔들며 기차를 보고 소리치는 아이가 있었는데 나와 같이 경성을 떠나고, 하얼빈에서 기다리겠다던 조용주, 바로 그 친구였다. 나는 가진 것도 없으니 즉시 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친구에게 “내 가방!”하고 물으니 친구는 자기 집에 갖다 두었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