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 사회복지위원회에서 오신 블랑카(Blanca) 수녀님은 저에게 교구, 본당, 시청이 함께하는 회의를 요청하셨습니다. 저는 급하게 시청에 연락을 해서 우선 비상대책위원회장을 만나 29개 공소 중 어느 공소의 피해가 가장 큰지 알아보았습니다. 가장 피해가 많은 곳이 성 안드레아 공소와 벨라 플로르(Bella Flor : 아름다운 꽃) 공소라는 보고를 듣고 바로 다음날 구호물품을 전달하러 갔습니다.
공소를 방문해 보니 7월부터 9월까지 무려 석 달 동안 단 한 방울의 비도 오지 않아 바짝 마른 풀과 나무에 불이 빨리 번졌고, 화재진압으로 말랐던 물까지 다 사용해 엄청난 가뭄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국제카리타스 지원금 1,430달러를 회의 결과에 따라서 시청 공무집행에 필요한 디젤 1,000리터, 공소 신자들을 위한 1,000리터 물탱크 5개, 가장 급한 공소를 위한 양수기 펌프와 소를 위한 식수대와 건초 몇 더미를 사서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불타버린 본당 신학생인 산티아고(Santiago Chuviru)의 집을 공소신자들이 함께 보수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훌쩍 지나 10월 1일에 드디어 기다리던 비가 내렸습니다. 모두가 폰으로 동영상을 촬영하고 SNS에 올린다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치솟는 불꽃이 아니라 땅으로 파고든 불길이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다시 땅 위로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수차례 반복하다 완전히 불이 꺼지고서야 본당은 김동진(제멜로) 신부님의 송별미사를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함께해 주신 신부님께 감사하고 본당 설립 52주년도 같이 기념하여 10월 13일 본당구역 교리 퀴즈대회와 송별미사를 성대하게 거행했습니다.
다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무렵인 10월 20일, 볼리비아에서는 대통령 선거를 치렀습니다. 하지만 개표 완료 20%를 남겨놓고 개표 방송이 중단되고 다시 출마한 현직 대통령이 직접 자신이 선거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이유는 당선자 득표율이 50%를 넘거나 50%를 넘지 않아도 1위와 2위의 득표차가 10% 이상이 되면 재투표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현직 대통령이 득표 1위를 달렸지만 개표를 완료하면 재투표의 가능성이 있어 멈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후 공식입장을 밝혔으나 언제나 그랬듯이 공식입장은, 시스템이 멈췄고 인터넷 신호도 약해서 멈춘 것이고, 다시 발표된 결과는 50% 이상 득표하지 못했지만 2위와의 차이가 10% 이상 났기 때문에 재투표 없이 바로 당선 되었다고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개표 집계도 부정확하고, 부정선거의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분개했습니다. 그 후 모든 도시들이 무제한 시위에 들어갔고, 바다가 없는 볼리비아는 육로만 막으면 모든 것이 마비가 되기 때문에 주요도로와 로터리를 점거했습니다. 보름이 넘게 계속되는 시위는 대한민국의 촛불집회처럼 비폭력으로 이뤄지면 좋겠지만 대통령은 쿠데타의 위험이 있다고 계엄령까지 선포하여 진압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저도 수녀님과 신부님과 함께 시위 전에 도시로 나갔다가 시위를 뚫고 주일미사 집전을 위해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많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투쟁하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시위의 혼란을 틈타 집 앞 도로에 장애물을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하는 가족들, 자기 부하들에게 힘을 과시하려고 도로를 점거해 트럭과 탁자에 앉아 카드놀이나 하는 동네에서 주먹 꽤나 쓰게 생긴 청년들, 요구한 돈으로 술을 사먹어 만취가 된 사람들, 주일미사 집전을 위해 끌레셔츠를 입고 시민위원회에서 발급한 통과허가문서를 제시해도 돈을 요구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과연 민주주의에 대해서 알고 있을까? 자신들이 지금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민주주의의 이름에 먹칠하고 있는 것은 모르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주일미사 30분 전에 무사히 도착했고 평소보다 2배나 더 걸린 7시간의 긴 여정 끝에 짜증, 분노,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정의와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독재자가 판치는 이 곳이 제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마(火魔)가 할퀴고 간 자리에 난 상처는 아물었지만 볼리비아 전체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성장통을 겪고 있습니다. 물론 시위로 주도로가 막혀 모든 것을 구하기가 어려워 주유소에서 3시간 동안 기다려 주유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공소 방문도 모두 취소하고 매일 저녁 본당에서 신자들과 함께 묵주기도와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한 본당을 책임질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성장통을 앓을 것입니다. 힘들겠지만 사제 서품 받을 때 정한 서품성구 “하느님의 힘으로 그리스도와 함께”(2코린 13,4)를 마음에 새기고 저 자신은 물론 함께 사는 모든 이의 복음화에 매진하겠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시행했던 프로젝트의 후원금이 헛되이 쓰이지 않도록 계속해서 유지 보수해 나가고 있습니다. 목장의
가축은 182마리이며, 우물에 문제가 생긴 공소에는 수리할 수 있도록 인부, 기구, 부품, 교통편까지 지원하고 있습니다. 우물을 팔 수 없는 공소에는 다른 방법으로 물을 구할 수 있도록 알아보고 있고, 내년에 시청이 실시할 우물 프로젝트의 혜택을 보지 못하는 공소들을 위한 사업도 구상 중입니다. 〈건강한 지붕과 벽〉 프로젝트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지만 이 모든 프로젝트를 위해 중고 중장비 구입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기억해주시고 기도해주시고 후원해주시고 도움을 주셨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저희도 지구 반대편에서 항상 은혜를 잊지 않고 미사와 기도 안에서 일치하고 지향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희망의 목장, 마르지 않는 우물, 그리고 건강한 지붕과 벽〉 프로젝트 후원
대구은행 505-10-160569-9 재) 대구구천주교회유지재단 조환길
* 그동안 ‘볼리비아 상 안토니오 본당 이야기’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과 연재를 맡아주신 김동진 신부님과 마무리를 해주신 최용석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