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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가르쳐 주는 교리
혼자놀기와 하느님 나라


전재현(베네딕도)|신부 . 대구대교구 사목국 청소년담당

마음열기

얼마 전 저는 인터넷을 통해 ‘귀차니즘’이라는 신조어를 얻어 만났습니다. 청소년 사목을 담당하고 있는 저로서는 이미 아이들에게 많이 알려진 이 신조어를 뒤늦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나름대로 청소년들과의 의사소통을 잘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청소년들과의 직접적인 만남이 뜸하다보니 그만큼 청소년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하지 않나 하고 반성해 보는 것입니다.

 

귀차니즘! 과연 무슨 뜻일까요? 귀차니즘이란 ‘주변의 간섭을 귀찮아하며 혼자 놀거나 잠자는 것을 즐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귀찮으면 안 한다는 말입니다. 일부 만화 비평가들은 이런 신조어를 만들어 낸 작가에게 ‘인터넷 세대의 개인주의적인 감수성’을 잘 담아냈다고 말합니다. 또 같은 작가는 쓸데없이 집단 속에서 북적대기보다 혼자 자기만족을 찾는다는 ‘혼자놀기’라는 키워드를 만들어내며 한국 젊은 세대의 새로운 감수성을 휘어잡았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나름대로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뭔가를 하고자 하는 바램은 있는데 귀찮아서 하지 않는 경우들이 종종 있는 것입니다. 친구와의 저녁약속을 비가 와서 취소하기도 하고, 치우기 귀찮아서 밥을 굶기도 합니다. 귀찮아서 타인과의 관계가 한발짝 멀어질 때가 있는가 하면, 귀찮음으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리듬이 깨질 때도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인터넷 세대인 요즈음 아이들은 습관적으로 컴퓨터 게임에 빠져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오는 즐거움과 기쁨으로부터 더욱 멀어지는 것 같아 걱정스러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웹(Web)을 통한 인간관계는 많은 경우 허무함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놀이 문화가 가상 공간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참으로 우려할 일입니다.

 

반면에 얼마 전 TV 뉴스에서 저는 재미있는 소식을 하나 접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개와 너구리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개와 너구리는 원래 상극이라 만나기만 하면 서로 싸우는 동물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미개가 새끼를 낳자 산에서 내려온 너구리는 아예 개집을 떠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어미개 이상으로 너구리를 따르는 새끼들을 어미개는 태연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혹시 너구리가 새끼개들을 물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개 주인이 너구리를 저만치 쫓아내면, 곧바로 돌아와 새끼개들을 품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가족처럼 지내는 이 개와 너구리는 곧 동네의 화제가 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쳐다보고 가게 되었고, 이로 인해 마을 인심마저 풍성해졌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하면서 저는 성서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늑대가 새끼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수염소와 함께 딩굴며 새끼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이사 11,6)

바로 이런 곳이 하느님 나라가 아닐까요? 서로 해치는 일 없이 서로를 아껴주고 보살피며 함께 살아가는 그런 곳 말입니다. 물론 서로 다른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곧잘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상처를 주는 타인일망정 우리는 혼자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아이들이 인터넷에 빠져드는 근본 이유도 더 깊은 인격적인 만남에 대한 갈망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컴퓨터 게임에 빠져 있더라도 그 근원적인 갈망에는 자신을 이해해주고 받아들여 줄 인격적인 관계에 대한 갈망이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개인주의’가 심화되고 있는 이때에, 부모는 아직 성장기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타인의 중요성을 명확히 인식시켜주어야 합니다. 인격적으로 또 신앙적으로 올바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청소년들은 타인과 함께 하는 삶을 통해 인격도, 신앙도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열린 마음으로 타인을 받아들이고 배려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개인의 부족한 인격과 신앙은 타인의 격려와 자극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하여, 주체적인 신앙인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하기

사제서품 후 첫 본당 보좌 신부로 있을 때 교리교사로 봉사했던 자매가 수녀원에 입회했다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며 옛날 이야기를 하다가, 교사 시절 동료교사들과 서로 일치하지 못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을 좀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전에는 ‘쟤는 왜 저럴까?’ 하며 비판하고 먼저 선을 긋기 일쑤였고 그래서 종종 다투기도 했는데, 지금은 ‘저 친구는 저런 면에서 나랑 좀 다르구나!’ 라고 생각하며, 있는 그대로의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야기를 들으며, ‘1년 가까운 수도생활이 이 자매를 이렇게 변화시킬 수 있었구나!’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수도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여, 함께 살아감으로써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수도자들은 서로 다른 너와 내가 만나 서로를 격려하며 삼위일체 하느님의 일치를 이 땅에서부터 드러냄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여 하느님과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이 땅에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모는 아이들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서에 나타난 공동체적인 삶의 중요성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백성 이스라엘을 영원히 움직일 수 없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야훼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 주셨습니다.”(2사무 7,24)

“여러분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복음 곧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어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확인하는 표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약속하셨던 성령을 주셨습니다.”(에페 1,13)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1고린 12,27)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에페 1,23) 

이밖에도 사도행전(2,42-47 ; 4,32-35 ; 5,12-14)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공동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성찬례를 거행하며, 다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고 각자가 가진 것을 공동으로 사용함으로써 교회 공동체 삶의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성서는 이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언제나 기쁘게 살았고, 보는 사람들은 모두 이들을 우러러 보았다(2,47 ; 5,13)고 전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갈구하는 참된 신앙인의 삶은 공동체와 동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실천하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교회헌장 9항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개인을 아무런 연결도 없이 개별적으로 거룩하게 하시거나 구원하시려 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람들을 한 백성으로 모아서 당신을 진실히 알아모시며 충실히 섬기도록 하시었다.”

 

자녀들과 함께 반모임에 참석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교회가 소공동체 운동에 많은 열정을 쏟아 붓고 있는 지금 가족이 함께 반모임에 참석하여 복음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며 참된 소공동체를 이루어 나갈 수 있다면 아이들의 인격적, 신앙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녀들의 견진 대부모님 가정과 정기적인 교류를 가지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특별한 또 하나의 소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현재 주일학교의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본당 주일학교에서부터 신앙 공동체의 삶을 익히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견진성사와 주일학교의 삶을 통해 준비된 청소년들이 올 해 여름 〈중·고등학생대회〉(일시 : 7월 23-25일, 장소 : 대구가톨릭대학교)에 참여함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형제들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