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다가, 문득 소설(小說)이라는 이름에 대해 생각합니다. 작은(小)이야기(說)가 그 이름입니다. 저는 작은 이야기만이 담아 낼 수 있는 고유한 내용이 있다고 믿습니다. 큰 이야기는 담아낼 수 없는 삶의 작은 주름 같은 것, 가만히 숨죽이고 봐야 겨우 느낄 수 있는 사람 사이의 작은 떨림 같은 것들은 작은 이야기가 아니면 담아낼 수 없습니다. 저는 학생들 앞에서 큰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론이란 이름의 큰 이야기입니다. 이론화의 과정은 일반화의 과정이며, 일반화의 과정은 개별적인 것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입니다. 개별적인 것들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개별적인 특성들은 애써 무시되며, 애써 무시된 것은 점점 중요치 않은 것이 되다가 결국은 사람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집니다. 분야마다 이론은 있지만 철학(哲學)의 이론은 큰 이야기 중에서도 아주 큰 이야기입니다. 아주 큰 이야기는 큰 그릇이라서 아주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아주 큰 이야기가 담아내는 이야기란 흐릿하고 뭉텅한 이야기일 때가 많습니다.
세계의 원리와 존재의 근원 등등에 대해 읽고 쓰다보면 ‘나’라는 인간은 정작 점점 작아져 소멸되는 느낌이 듭니다. 천문학자들은 천체를 관찰하며 무변광대한 우주 안에서 먼지처럼 떠도는 자신의 왜소함을 상시적으로 깨닫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천문학자들이 자주 우울해한다는 말을 저는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과연 그럴 수 있겠다 싶습니다. 이야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이야기는 점점 더 뭉텅해지고 희미해집니다. 이야기가 극도로 커지면 그 이야기는 결국 아무 이야기도 아닌 것이 되지요. 비어있는 언어가 됩니다. 저 광활한 우주처럼 막막해집니다. 듣는 이는 한없이 작아집니다. 우주 안을 떠도는 먼지처럼 말이지요.
『침묵』의 작가로 잘 알려진 엔도 슈사쿠는 근자에 『문학강의』라는 책을 냈습니다. 저는 이 구절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저는 대설가가 아니라 소설가라서 작은 이야기밖에 할 수 없습니다. (…) 우리 소설가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인생을 알 수 없고, 인생에 대해 결론을 낼 수 없기 때문에 손으로 더듬듯이 소설을 쓰고 있을 뿐입니다. 인생에 대해 결론이 나오고 미혹이 사라졌다면 우리는 소설을 쓸 필요가 없겠지요. 소설가는 헤매고 또 헤매는 사람입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고 손으로 더듬어가며, 인생의 수수께끼에 조금씩이라도 다가가고 싶어서 소설을 쓰는 겁니다.”
원고청탁 때 처음 들은 부탁은 철학자들의 일화를 글로 엮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두 가지 이유로 고사했습니다. 우선은 철학자의 삶이라고 별다른 것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철학자들의 사상을 짧은 지면에 우겨넣으면 일반적인 처세훈(處世訓)으로 귀결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러라고 철학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저는 차라리 정해진 주제 없이 글을 쓰라면 쓰겠다고 했습니다. 원하는 대로 하라는 허락을 받았고,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이러한 방식으로 쓰고 있습니다. 정해진 주제도 없이, ‘작은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작게 하고 있습니다.
글에서 드러날 저의 생각 정도는 여러분도 하는 생각입니다. 여러분이 모르는 것은 저 역시도 모르는 것이고요. 저는 계몽하는 인간도, 훈계할 수 있는 인간도 못 됩니다.
굳이 말하자면 세상에 떠도는 수많은 계몽적 담론과 훈계들에 좀 지쳐있는 인간이지요. 제가 싫어하는 일을 여러분에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단지 ‘헤매고 또 헤매는 사람’으로서, 어둠 속에서 더듬듯이 말을 하고 글을 쓸 뿐입니다. 제 이야기는 소소한 이야기입니다. 차 한 잔 마시면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 한번 읽고 곧 잊어버려도 좋은 이야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런 이야기들 속에 우리가 놓쳤던 삶의 빛 같은 것이 희미하게라도 반짝였다 사라진다면 그걸로 좋겠다 싶습니다. 작은 이야기로 만나 뵙겠습니다. 이 코너의 이름은 ‘작은 이야기’입니다.
* 이번 호부터 새로 연재되는 ‘작은 이야기’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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