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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온 편지
시작하면서


글 심탁 클레멘스 | 신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교구 선교사목

 

(먼저 독자 여러분께 양해를 구합니다. 재미있고 유익한 글을 쓸 자신이 없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초보 선교사로서의 소소한 일상의 체험들과 소감들을 단순히 나누겠습니다. 하느님과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공유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왜 내가 여기에?”, “교회의 맏딸 프랑스 교회에 한국 선교사가 뭔 말?” 제가 선교사의 새로운 부르심에 응답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선교사로 살기 시작한 지 3년이 넘어 흘렀습니다. 간단히 제가 선교사로 파견되기까지의 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2011년 교구 설정 백주년 행사 이후 건강 문제로 안식년을 허락 받고, 파리 가톨릭 대학에 안식년 코스를 등록하였습니다. 심신이 지쳐버린 저 자신을 위해서, 또 나름 이해한 우리교회를 위해서 새로운 비전을 찾고 싶었습니다. 과거 지도교수(앙리-제롬 가제 신부)의 도움을 받아 먼저 성경해석 관련 서적 번역을 권고 받아 독서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우연히 읽은 칼 라너의 글에서 새로운 교회상의 모델을 보는 듯 했습니다. 요약하면, 초대 교회의 모습은 콘스탄티누스 시대처럼 국가 종교나 중세 교회 형태가 아니라, 사회 속에 흩어진 개인과 소수자의 ‘디아스포라’였습니다. 즉 팔레스타인 유다 사회 안에서 탄생한 소수자 그리스도교 신자 개인과 공동체, 박해로 인해 흩어진 이주민의 모습이거나 혹은 선교 활동을 하는 선교사 개인과 공동체였습니다. 칼 라너는 20세기,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후 신자수 감소, 교세 약화, 사제 수도자 성소 감소, 선교 부진 등 여러 가지 교회의 걱정들에 휩싸인 교회 내 패배주의를 극복할 방법이나 대안을 ‘디아스포라 교회론’에서 찾고자 했습니다. 독서를 통해 제가 얻은 개인적 결론은 현대의 사목은 ‘신앙과 복음으로 무장된 선교적 개인의 양성’과 ‘소수자 공동체의 활성화’에 교회의 관심이 집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개인의 사정을 잘 돌보는 사목으로 심화되어 가야 합니다. 또한 어떤 신자의 탄생은 동시에 한 사람의 선교사의 탄생이며 그는 잠재적 순교자입니다. 신학생 때 이후 공부에서 감동을 느끼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교구설정 백주년을 맞아 교구차원에서 안세화 초대 교구장 주교님과 주교좌 계산성당에서 시작된 초대 본당 김보록 신부님의 고향 성지 순례를 준비하였습니다. 마침 파리에 유학 중이거나 중앙아프리카 선교를 준비하던 교구 소속 신부와 신학생들이 그 구체적 순례 일정을 잡기 위해 답사를 하였습니다. 특히 당시 유학 중인 전형천 신학생의 수고로 자료들을 잘 정리하였습니다. 답사 중에 김보록 신부님의 고향(벨포르 몽벨리야르 교구)에서 그 후손들과 만나는 행운이 있었습니다. 또한 특히 안세화 주교님의 고향(스트라스부르 교구)과 주교님이 세례 받은 성 미카엘 성당에 방문해서 그분이 세례 받았을 세례대를 보고 작고 아름다운 성당 제단 앞에 섰을 때 솟구치는 뜨거운 감동의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아, 당신은 이런 곳에서부터 준비된 분이시군요.’라는 혼잣말과 함께 ‘나는 지금까지 뭐하고 살았지?’라는 질문이 가슴을 때렸습니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벽력같은 외침이었습니다.

 

저희 순례 준비팀 일행은 그 당시 스트라스부르 교구장님(쟝-삐에르 그랄레 대주교, 현재 은퇴)과 만나서 인사를 드리고 초대 교구장님 덕분에 맺어진 두 교구 사이의 인연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장신이신 프란치스코회 출신의 대주교님께서는 한국 교회의 역사를 잘 알고 사랑하고 계셨고, 우리 인연에 대해서도 매우 흡족해 하셨습니다. 자매결연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누었고, 조만간 대구대교구 교구장님과의 만남을 기약하면서 헤어졌습니다. 교구 설정 백주년 기념 역사 탐사는 대구대교구의 초대 주교님과 본당 신부님의 고향 순례준비를 위한 것이었지만 저에게는 신부로서 새롭게 선교의 성소를 찾는 은혜로운 기회였습니다.

안세화 주교님, 어린 시절 개구쟁이 소신학생이셨던 분이 선교사가 되어 한국에 가시어 대구대교구의 기초를 놓으시고 획기적인 발전을 시키신 분이십니다. 대신학생 시절, 그분은 탁월한 철학적·문학적·신학적 지식과 영성을 갖추셨고, 사목적 추진력과 지혜와 능력을 갖춘 분으로서 이곳 프랑스에서도 훌륭한 목자로 명성을 떨칠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왜? 무엇 때문에 지독하게 가난한 한국까지 선교를 가셨을까?’라는 질문이 다시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의 사명에 충실하며, 보편교회를 위해 가장 가난한 나라의 선교를 떠나신 것이었습니다. 시대만 조금 더 빨랐어도 순교하셨을 그 땅으로 말입니다. 사춘기 시절부터 성모당, 성직자 묘지를 별 감동 없이 지나치곤 했습니다. 지금은 그분의 무덤자리가 이곳 스트라스부르 교구 그 분 고향의 풍경들과 겹쳐져 그 분의 존재가 더욱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선교를 떠나기 전 저는 파리 생슐피스성당 사제관에 머물렀습니다. 이 성당은 이문희 대주교님께서 사제 서품을 받으신 성당입니다. 프랑스 상원이 바로 옆에 있고 뤽상부르공원이 사제관 정문 앞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생슐피스 회원 신부들이 주로 기거합니다. 이곳은 두 가지 점에서 저에게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첫째, 고해신부로서 고해성사와 면담을 통해 사람의 문제는 한국이나 여기나 거의 똑같다는 생각이 선교활동 중 문화적 차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둘째, 사랑의 동기부여가 결정적 용기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

본당에는 월남전 보트피플로 피난 온 70대 뽈 신부님이 40년 넘게 보좌신부로 봉사하십니다. 대주교님의 제안을 받고 선교를 떠나기로 결심했지만 저는 시합에 나서는 선수의 도전의 열정과 동시에 자신의 무지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프랑스어 실력, 사목적 쓸모에 대한 염려 때문에 더욱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뽈 신부님께 여쭈었습니다. “신부님, 40년 넘게 파리에서 선교활동을 하시는데 그 비결이 뭡니까?” 신부님께서 대답해주셨습니다. “끌레망, 자네가 알자스 사람들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돼! 그 나머지는 저절로 다 된다.” 해방의 말씀이었습니다. “아! 선교, 그것은 잠정적 순교요, 결국은 사랑이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이번 호부터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교구에 선교사로 파견된(2016. 8~ 현재) 심탁(클레멘스) 신부님의 프랑스에서 온 편지가 연재됩니다. 많은 관심과 애독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