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호에 실릴 글을 2월에 쓸 수는 없습니다. 교정·편집에 인쇄도 해야 하니, 2월호의 원고 마감일은 당연히 2월 전이어야 합니다. 빛 잡지는 글을 두 달 전에 받더군요. 저는 이 글을 12월에 씁니다. 2020년 새해를 맞고도 두 달을 보낸 여러분이 읽을 글을, 저는 2019년 12월에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 사이에는 두 달의 시차가 있는 셈이군요. 이 시차가 문득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저와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한 여러분들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정서적인 간극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 간극은 두 달이라는 시간차가 자아낼 수 있는 간극 중에는 큰 편에 속하겠지요.
저는 지금 12월을 삽니다. 시내에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섰고, 카페에는 연신 캐럴이 흘러나옵니다. 함께 사는 동료들도 12월의 동료들이고,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종종걸음을 하는 행인들도 12월의 행인들입니다. 처음부터 12월의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은 12월에는 12월의 사람이 됩니다. 허망함과 조바심, 그 사이를 비집고 오는 크리스마스의 들뜬 감흥 같은 것들이 12월을 사는 사람들에겐 서려 있습니다. 벌여놓은 일은 마무리하지 못했고, 애써 해 놓은 일은 처음부터 없었던 일처럼 망각의 숲으로 숨어버렸습니다. 허망함을 잊으려 일에 더 몰입해보지만 이 일마저도 역시 망각의 숲으로 숨어 들리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헛헛한 깨달음들이 켜켜이 쌓여 12월이 되었습니다. 끝끝내 지울 수 없는 아쉬움, 그리고 이젠 애써 닦으려고도 하지 않는 고단함의 얼룩 같은 것들이 12월의 얼굴에는 묻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찢어버린 12월의 달력을 저는 아직 망연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새해 달력을 넘긴 여러분에게 희망의 말이라도 건네고 싶지만 지쳐있는 저는 막상 그러지를 못합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12월의 사람으로 이 글을 씁니다. 한 해를 산다는 것은 새해 첫날 먹었던 마음들이 조금씩 무너져 가는 것을 아프게 지켜보는 일이며, 부푼 희망 속에 숨겨두었던 일상의 비루함을 하루하루 꺼내보는 일이라고 12월의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을 방도가 달리 없다는 걸 저는 요즘 자주 느낍니다. 2020년의 삼백예순다섯 날들도 하루하루 자신의 민낯을 보이며 저에게 일용할 비루함을 뱉어놓겠지요. 그리고 2020년 12월이 되면 저는 또 여지없이 12월의 사람이 되어 망각의 숲으로 퇴각한 한 해를 무연히 바라볼 것입니다.
김영민 교수는 새해를 여는 칼럼의 제목을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은 없다’*로 지었습니다. 그의 칼럼에는 새해의 희망도 없고, 어찌해보겠다는 계획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나아질 것이라는 그 흔한 덕담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그럴싸한 기대를 가지고 한 해를 시작하지만, 곧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지는지 깨닫게 된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는 그저 한 해를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소소한 근심을 누린다는 것은, 이 근심을 압도할 큰 근심이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이 작은 근심들을 통해서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고 말이지요.
제가 견뎌야 할 것이 일상의 비루함뿐이라면, 그것은 그것대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하루를 사는 일이 바늘로 살을 찌르는 것처럼 고통스럽지 않고 단지 비루할 뿐이었다면, 단지 비루할 뿐이어서 그 비루함만 견디면 되었다면, 그것은 제가 그렇게 불행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행복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새해에 어떠한 계획도 세우지 않고 한 해를 맞겠습니다. 매일 주어지는 비루함을 곱씹으며, 하루하루의 근심을 이어 나가겠습니다. 12월에 단지 허망해 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견뎌 준 몸과 정신, 그리고 나를 견뎌 준 이웃들에게 미안하고 또 감사합니다. 저는 이 글을 12월에 씁니다. 여러분의 2월은 괜찮습니까? 괜찮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저에게는 멀리 있는 봄이 여러분에게는 그리 멀지 않겠군요. 여러분의 2월로 저도 건너가겠습니다.
*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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