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9월자로 계산성당 만한 ‘성요셉(St. Joseph)성당’의 협력 사제 겸 노인요양병원 및 파스터르종합병원 원목으로 첫 발령을 받았습니다. 우선 파스터르병원은 수녀님들(Soeurs de la charite de Strasbourg)이 창설한 2천 병상 정도의 종합병원입니다. 전쟁 중이나 그 직후에는 수녀님들이 간호사들이었습니다만, 지금은 성소가 없어서 팔십대 수녀님들 두세 분이 상징적으로 성당을 지키고 봉성체를 돕고 계십니다. 신부, 평신도, 원목 외에도 자원봉사로 운영 되는데 은퇴한 평신도들이 일정한 양성교육을 수료한 후에 주일봉성체 및 환자방문을 합니다. 주일미사에는 150~200명 정도로, 비교적 고정적인 수의 신자들이 참례하는데 환자 가족들이나 봉사자들, 그리고 병원 주변의 신자들이 주를 이룹니다. 무엇보다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이 훌륭해 보였습니다.
에피소드 하나. 어느 더운 여름 날, 저는 병원의 비상연락을 받고 자전거를 타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여러 단계의 보안 문을 거쳐서 영안실로 안내를 받았습니다. 유가족이 가난해서 성당에서 장례식을 치를 수 없으니 신부가 알아서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름 클레지 셔츠를 입은 상태로 영대를 하고 준비된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확 끼쳤습니다. 얼어붙은 시신이 제 눈앞에 있었고 그 시신은 금방 냉동고에서 나왔으며 그 방은 냉방시설이 확실히 된 그런 곳이었습니다. 신자생활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그분들은 제게 뭘 요구해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제가 신부니까 뭔가 알아서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불어로 된 예식서가 손에 있으나 병자나 장례식 관련일 뿐, 냉동고에서 막 나온 시신 앞에서 뭘 어찌해야 할지…. 게다가 실내온도 때문에 한기마저 심하게 들어 어금니가 다다다 부딪치고 온 몸이 떨리는 상황에서 마치 병자에게 하듯이 이마와 손에 성유를 바르고 성수를 뿌리는 손은 떨리고…. 얼음 시신의 영혼을 위해서 더듬더듬 불어로 기도하며 성수를 뿌리고 기름을 바르며 제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정중하고 거룩하게 대했습니다. 가족들은 시신 이마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함께한 가족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위로를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주님의 기도’조차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자전거로 귀가하면서 저 자신이 신부로서 할 일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해 본 시간이었습니다. 왕초보 선교사의 기쁨을 은근히 느끼면서요.
에피소드 둘. 노인요양병원에서는 토요일 오후 3시 30분에 미사가 봉헌됩니다. 주인공들은 백퍼센트 휠체어를 타고 미사에 오십니다. 봉사자들은 같은 노인이지만 걸을 수 있는 어르신들로, 병실에 가서 입원하신 노인들을 휠체어에 태우고 지하 임시 경당으로 모셔오는데 주로 70~80대입니다. 대부분 노인들인데 간혹 40~60대 젊은이들이 가족방문을 와서 미사에 참석합니다. 이 병원에서 저는 신부로서 사랑받는 편이었습니다. 첫째 비결은 노인들 귀에 잘 들리게 발음을 하기 때문입니다. 미사 중에 마이크 사용에 신경을 쓰면서 또박또박 발음하면 됩니다. 미사 후 일일이 악수할 때면 저의 강론이 훌륭하다고 소감을 전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저의 말이 잘 들린다고 칭찬하십니다. 잘 들리게 선포하기, 그 자체가 기쁨이 될 수 있었네요. 둘째 비결은 미사 전후로 한 분 한 분 손을 잡고 눈을 맞추고 개별 인사 나누기를 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턱 가까이 있음을 아시는 이분들은 신앙에 의지하는 만큼, 그 길목 동반자인 신부들을 반가이 대하십니다. 보기에도 고마운 것은 이분들 다수는 신앙인으로서 기도와 봉사에 익숙하시다는 것입니다. (…) 한 가지 이곳 요양병원에서 감동적이면서 가슴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어느 날 미사 전 인사를 나누는 중에 휠체어에 앉은 할머니 한 분이 반가운 얼굴로 웃으시면서 “끌레망 신부님, 나 이렇게 됐어요!’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분은 젊은 시절부터 40년 가까이 이런 봉사를 하신 분으로, 2주 전까지만 해도 이곳 봉사자였습니다. 이 봉사자들의 다수는 이렇게 인생의 마무리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 노년의 삶이 청정한 신앙의 모델로 보이고 거룩하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수가 줄긴 하지만 그런 후배들이 계속 이어집니다. 그렇게 봉사하며 사시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그렇게 주님 곁으로 떠나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에피소드 셋. 성요셉성당, 2016년 9월. 이곳 사회도 그렇지만 특히 교회는 고령화 되어 있습니다. 간혹 미사 중에 소수의 젊은 10대 청소년들이 가족들과 미사에 참례합니다. 그들 중에 중·고생 4~5명은 미사 후 자기네들끼리 수다를 떨다가 자전거를 타고 헤어집니다. 저는 용기를 내어 다가가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별 공감대가 없어서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학부모 한 분에게 아이들의 청소년 밴드를 만들면 어떨지 생각을 타진해 보았습니다. 너무 좋은 의견이라고 장단을 맞추어줬고, 그분의 중재로 청소년 밴드를 만들었습니다. “The Envoice(파견된 외침/목소리)”, 이 본당에는 청소년 예산이 전혀 없었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투자를 해도 모자랄 판에….’ 기계에 문외한인 제가 앰프, 키보드, 마이크… 등의 장비들을 하나하나 장만했습니다. 은퇴한 노인들 몇 분이 본당 운영전체를 배타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환경에서 마침내 하룻강아지 신부와 함께 청소년 밴드가 탄생했습니다. 초·중·고 4단계 교리반(세례 후 첫고해-첫 영성체-신앙고백-견진성사) 중에서 첫 영성체와 견진성사 때, 주일 가족미사 때, 그리고 부제서품식 후 연회 때 이 팀이 연주를 했습니다. 대부분 어른들의 찬사과 격려(드디어 본당이 살아난다)와 몇 분들의 불평들(시끄럽다, 주위를 어지럽힌다 등)을 들었습니다. 그 사이 3년이 넘게 흘렀습니다. 현재는 대학진학 등으로 임시휴업상태입니다. 주니어 팀을 만들고 저는 다른 도시(오베르네, Obernai)로 인사발령을 받았습니다.
콜마르의 성요셉성당은 텃세가 센 곳으로 유명했던 본당이었습니다. 거기서 천지도 모르는 한국 신부가 청소년 밴드를 만들어 자립한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첫 부임지 1년 만에 콜마르 시내 주교좌 중·고등학교 교목 겸 대리구 청년·청소년 사목 책임자로 발령이 났습니다. 성요셉성당 주임신부는 제가 밴드를 데리고 떠날 것이라며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투자 없이 성과에만 관심을 보여서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사실 음악팀은 대리구 전체의 필요에 따라 봉사했습니다. 이 활동은 저의 가장 기쁜 사명 중의 하나입니다. 이제 새로 부임한 본당 오베르네 (OBERNAI)에서도 새롭게 밴드를 결성하는 중입니다. 모토는 “젊은이들이 젊은이들을 선교한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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