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의 현장에서”는 천주교대구대교구 사회복지회에서 주최한 “2019년 대구카리타스, 우리들의 이야기” 공모전에서 수상한 사회복지사들의 수기를 한 편씩 소개해드립니다. - 편집자 주(註)

대학교를 다니면서 별다른 꿈을 찾지 못해 2년간 휴학을 한 저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다가 원하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다시 복학해서 졸업을 했습니다. 제가 취업을 하려던 2009년도는 2008년부터 경기불황이 시작되어 대학생들이 취업난으로 힘들어하던 때였습니다. 저 역시 공무원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그동안 학교성적에는 많이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그마저도 합격하지 못하고 졸업을 해서 당장 취업이 걱정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취업사이트에서 ‘대구가톨릭사회복지회’에서 사무원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저는 사회복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가톨릭’이란 단어만 보고 무작정 원서를 넣었습니다. 초등학생 때 세례를 받고 첫 영성체를 한 저는 중·고등학교 때에는 잠시 소원했지만 스물 살 때부터 다시 성당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대학교 생활보다 공무원 수험생활보다 청년회와 교사회를 종횡무진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천주교가 좋았습니다. 어린 시절을 왜관에서 보낸 저는 성베네딕도회왜관수도원을 쉽게 접할 수 있었고, 학교 친구가 성당 친구였고, 동네 어르신들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입니다. 비록 부모님은 신자가 아니셨지만 천주교에 대한 무한한 긍정의 힘으로 친구를 따라가서 교리를 듣고 공부를 하고 세례를 받고 영성체를 했습니다. 그래서 ‘사회복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원서를 넣을 용기가 있었나봅니다.
며칠 후 서류를 통과했으니 면접을 보러오라는 문자를 받았고 면접을 잘 본 것 같았는데 결과는 낙방이었습니다. 솔직히 안타까웠지만 어차피 ‘내가 잘 모르는 분야였으니 괜찮다.’라고 합리화시키며 겨우 마음을 추스르던 중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합격자에게 사정이 생겨서 후보 1번이던 제게 연락했다며 출근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때 취업이 목적이던 저는 다른 곳에서 서류합격 후 면접을 보러오라는 연락을 받아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정말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두 곳 다 해보지 않은 일이라서 어느 곳에 가야 내가 더 일을 잘 할 수 있을지, 내게 맞는 일이 무엇일지 한참의 고민 끝에 제 발길은 결국 ‘대구가톨릭사회복지회’로 향했습니다.
복지관의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습니다. 사회복지의 5대 사업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나라에서 받는 보조금, 후원자들의 후원금, 자원봉사자와 사회복지를 필요로 하는 대상자, 영구임대 아파트 등 모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기에 무섭고 낯설었습니다. 무엇보다 복지관의 회계업무에 대한 부담과 압박이 너무 컸습니다. 단돈 만 원도 큰돈 같았던 제가 한 기관에서 몇 십 억의 예산을 관리한다는 것, 도대체 예산의 ‘0’은 왜 이렇게나 많은 것인지,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은 이전에 하던 것처럼 기안을 주고 카드를 달라고 하고 지출해 달라고 하는데 기안은 어떻게 보는 것인지 어떤 카드를 주면 되는지 하루하루 회계마감은 얼마나 더딘지 점심시간에 밥만 먹고 일을 해도 시간이 모자랐습니다.
사무원인 제가 사회복지사 선생님들께 도움을 드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아서 처음 1년은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은 진정한 사회복지사였습니다. 제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시고 너나 할 것 없이 출퇴근길에 위로와 격려의 문자를 보내주셨고 덕분에 저는 조금 힘이 났습니다. 흔히 ‘일 힘든 것은 참아도 사람 힘든 것은 못 참는다.’고 하는데 저는 너무나도 좋은 사회복지사 선생님들과 함께 일하고 있었기에 그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 한 달, 일 년이 지나면서 저는 조금씩 일에 익숙해졌습니다.
사회복지와 사무원 일에 적응될 때쯤 복지관에서 직원들끼리 공부하며 복지관의 비전과 미션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직원 개개인의 슬로건 만들기 작업도 같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래서 몇 주를 고민해 보았습니다. ‘나는 어떤 사무원이 될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사회복지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회복지사의 슬로건처럼 멋진 것을 따라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처럼 누군가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면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혁명적인 슬로건을 담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나는 이렇게 훌륭한 사회복지사들과 함께하는 것은 할 수 있겠다. 현장에서 주도적인 일은 사회복지사가 하지만 그 일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려면 나의 도움도 필요하기에 사회복지사들이 힘들고 지칠 때 사무원인 내게 기댈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끝에 ‘사회복지사들과 함께하는 사무원이 되겠습니다! 사무원 이미애’ 라는 슬로건을 만들었습니다.
때로는 ‘사무원은 우리처럼 힘든 일 하지 않아서 좋겠다, 사무원은 자리만 지키면 돼, 사무원은 시키는 일만 하면 돼.’라는 시선에 힘들 때도 있었지만 저는 슬로건을 정할 때부터 스스로에게 다짐했습니다. ‘내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비록 사회복지사와 똑같을 수는 없어도 다름을 인정하고 나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자. 그러면 사무원이라는 것 때문에 내가 힘들진 않을 것이다. 나는 사회복지사와 함께하는 사람이기에 나를 떼놓고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자!’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 것이 올해로 만 10년째입니다. 그동안 저는 일에 조금은 더 익숙해졌고, 이곳에서 부부의 인연을 맺어 1남 1녀를 둔 성가정을 이루게 됐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서 저의 슬로건인 부끄럽지 않은 ‘사무원 이미애’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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